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위하여 책소개와서평

이 소책자는 크게 네 분절로 이뤄져 있다. 그 중 세 분절은 사상의 자유로 묶을 수 있고 한 분절은 양심의 자유 보다는 종교의 자유로 보인다. 다시 사상의 자유로 묶은 세 분절은 정치적 자유로 보인다. 그렇게 볼 때 경제적 자유가 없고 종교의 자유는 잉여적이라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인권법적 시각으로 보는 분류법은 정치적 시각으로 보는 분류법과 그 만큼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 헌법에 정치적 자유나 경제적 자유는 등장하고 제반 자유권도 등장하고 거기서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나타나니 이 소책자는 인권법뿐만 아니라 헌법적 시각을 가진다는 점에서 공유하는 바가 크다. 정치 이데올로기로는 정치적 자유를 경제적 자유가 뒷받침할 때만 가치가 살아난다. 소책자에 경제적 자유는 잉여적 권리밖에 없다는 점에 주목한다. 경제적 자유는 사업할 권리, 노동할 권리로 나타난다. 그것이 발달하면 평등할 권리라든가 분배의 형평으로 나타날 수 있고 행복한 삶을 향유하거나 경제 발전의 사회적 목표의 보존을 제안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적인 삶은 경제적 정의를 요구할 수 있어 사회의 불의한 경제적 부조리를 거부할 수 있다. 거기에 더해 방해나 수정을 요구할 수 있으며 법률 기타가 잘못되었으면 개정을 요구하는 집합적 요구를 만들 수 있다. 사회를 경제적 자유의 원리가 충족되는 형태로 바꿀 것을 결의할 수 있고 거기서 정치적 자유가 온당함의 보존을 요구할 수 있다. 사회 시스템이 경제적 자유를 지탱하는데 부적절하다고 집합적 결의를 할 때 사회 시스템의 변화를 결정할 정치적 자유의 궁핍을 발견한다. 정치적 자유란 임의적인 사회적 가치의 정립을 요구하는 것보다 경제적 자유와 같은 살아있는 삶의 문제를 결탁할 때 현실적 유의미성을 담보할 개연성이 높아진다. 추상적인 사회 가치나 도덕적 목적은 인간의 수단화 되지 않는 목적으로서의 가치를 고양하나 현실적인 살아있는 삶의 충만함이 결여될 수 있다. 이 소책자에서 내가 경제적 자유의 결여를 말하는 것은 이 소책자에서 현실적인 살아있는 삶의 운동성의 결여를 발견한 것과 동어반복이다. 노동하고 집단적 의사 결정을 하거나 집단 이익을 위해 집합 행위를 하는 것의 이데올로기적 결정성이 현실적인 살아있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담론과 달라지는 측면이다. 경제적 권리를 배제한 논구는 설혹 정치적 권리를 확보하여도 한계가 있어 사회적 계급 구성의 제 구성의 일부만을 쟁취할 수 있다. 거기서 부분적 선전선동으로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 경제적 목표는 사라지고 있다. 소책자를 읽으면서 유심히 관찰한 부분들 중 하나인데 현실적인 살의 살아 있는 문제를 동원하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고 삶의 이해력에서도 민중에게 필요한 것과 지식계층이 요구하는 것을 섞는데도 취약했다. 순수한 법학을 요구하는 법조계의 풍토를 대리하는 법학자의 현실성 결여를 염려할 수 있는 것이다. 소책자에 등장하는 보안관찰법, 빨갱이 콤플렉스, 국가 보안법과 집총 거부 또는 병역 거부가 사회와 맺는 관계를 요구한다면 그는 철인이거나 사회학자일 것이다. 소책자가 사회학 구조를 충분히 개진했으면 일독자로서의 요구사항일 뿐이다. 사회학 논의 구조로 빠지면 당연히 경제 사회의 요구 사항을 담보할 개연성이 높아진다. 삶의 현장과 유리된 공적 공간이 포섭 안하는 것이 무수한 사적 공간의 사적 이해관계이다. 텍스트가 자연스레 산출하는 이해 상충의 문제를 당파적 이해관계인 아닌 중립적 중성 학문 논구로 빠져나가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변호사가 사건을 수임했을 때 그가 당파적 이해관계인일까 중립적인 중성적이고 순수한 판단자일까 묻지 않을 수 없다. 공적 관념의 이상은 현실적인 당파성을 넘어서는 이상의 신기루가 아닐까. 소책자에서는 입장이라는 존재가 드러난다. 추상적이고 가치추구하나 대중의 바다로 한 번도 몸을 던질 수 없는 지식인의 생각하는 갈대가 나타나는 것이다. 


사건의 진상과 허명의 연대기를 살피어 가는 사람들 영화소개와평론

다른 영화를 실수로 한 번 더 보더니 유사한 영화군이 존재함을 깨달았다. 법정, 누명, 진상 규명과 같은 서사 규칙이 존재하는 영화들이다. 형사 법정의 범주로 드는 사건들이 현실 세계에 많이 존재했고 영화 서사의 탄력을 부여해왔다. 의뢰인에서는 의뢰인이 배우자를 죽인 혐의로 기소되어 시신 없이 재판을 받는다. 결과는 무죄 방면이다. 예전 들었던 풍월에 살인 사건의 요소들이 있는데 만일 시신이 없다면 사건이 성립 안한다고 들었다. 영화의 도입 무렵 변호사의 입을 통해 그 확인이 되는데 설명이 다르다. 시신이 없어도 유죄를 받을 수 있다는 것 같다. 의뢰인은 극중 서촌 부녀자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경찰의 심문을 받았으나 풀려난 전적이 있으나 영화의 후반부에야 그 사실이 나온다. 그 이유로 끝까지 의심했던 형사 한 명이 의뢰인을 미행하고 도청하고 집에 증거를 심은 것으로도 비친다. 영화에는 설명이 차곡차곡 되어 있지 않으나 나는 이 형사가 사실은 진범 같다. 서촌 부녀자 살인 사건의 진범이 잡히지 않는 게 이 형사가 범인이나 동료 형사들이 묻고 이 형사는 유일한 용의자인 의뢰인을 물고 늘어지다가 배우자에게 의뢰인이 범인이라고 속이어 신고를 유도하는 과정에서 배우자를 죽인다. 바로 그 날 의뢰인은 집으로 돌아와 배우자의 시신을 보고는 그것을 수습해 사진 속의 장소로 옮기나 동기 부여가 약하다. 변호사는 사건을 수임 받은 후 얼마 안 있다 의뢰인은 범인이 아니고 진범은 따로 있다고 확신을 하고 의뢰인을 진심으로 도와주기로 한다. 검사는 사건을 기소하고 재판을 진행하지만 내 추측의 형사가 진범임을 알 수 있고 의뢰인이 범인이 아니라고도 알 수 있는 위치이다. 사건을 두고 경찰과 검사가 동일한 이해의 배를 반드시 같이 타는 것은 아니다. 경찰 중에 진범이 있었다는 내 가정은 영화상에 가끔 등장한다. 검사는 그렇지만 의뢰인을 서촌 부녀자 사건의 범인으로 몰아갔다가 실패한 후 발생한 우발적 사건의 범인이 의뢰인이라고 진심으로 확신할 수 있을까. 전적의 공허한 가정이 무너진 후 검사는 그 다음에 자신의 가설을 고수하게 될까 아니면 회의적으로 될까 의심스럽다. 영화의 결말은 보기에 따라서 형사 피의자가 실제로는 진범인데 형사 공판의 불철저로 무죄 방면되는 것으로도 보인다. 검사는 항소를 할 것으로 기대되는데 변호사가 비밀 마이크로 의뢰인의 자백을 따고 형사들이 덮친 후 그 증거를 검사에 넘기면서 거래를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증거로 쓸 수 없는 증거로 항소까지 방어하고 진범인 형사로부터 의뢰인을 실제로 보호할 방법을 구하는 것이다. 진범인 형사를 동료 경찰들이 인지할 수 있을 때 그 형사로부터 의뢰인을 보호하도록 경찰들을 움직이는 것이다. 시신을 의뢰인이 빼돌린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로 사건 현장에 두 번째로 도착해 어딘가에서 감시하고 있을 형사로부터 자신과 증거를 보호한다. 둘째로 배우자를 사랑하는 감정 속의 의뢰인은 배우자의 죽은 몸을 소중히 지키고 증거 인멸용 강제 화장으로부터 참된 장례를 자신의 실제 손으로 해준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영화 동안 관객들이 했을 질문 하나가 풀린다. 시신을 아파트 창밖으로 던진 후 빈손으로 내려가 수습하는 것이다. 영화 내내 맥거핀으로 쓰인 폐쇄 회로 티비 영상물에의 답변이다. 현대적 관객은 의사과학을 맹신하고 인간의 의리와 정을 믿지 않는다는 간단한 약식 논증을 한 셈이다. 정의와 진실 탐구는 변호사와 의뢰인의 몫이고 서사 규칙의 준수 여부는 감독과 극작가의 몫이다. 경찰의 전통적 위상은 문민 사회로부터 시민의 보안관으로는 바뀌었으나 그 많은 서사 규칙의 내부에 존재했던 사건의 담지자로부터 소외되었다. 검사는 정의의 최종적 수호자라는 서사 규칙으로부터 이중적 존재로 탈피하고 있으며 법관은 정의의 최종적 수호자라는 서사 규칙으로부터 시민의 보안관으로 도대체 내려앉지 않는다. 사실은 허구이고 진실은 사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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