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영화소개와평론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영화 한 편을 염두에 두고 동네 극장으로 갔다가 없어서 별로 보고 싶지 않았던 이 영화를 보고 말았다. 딴 영화 두 편은 그레이 시니어의 작품으로 각각 대립하는 측면이 있어 관심이 있으나 폭력 성향이 워낙 강해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도합 네 편이 관심을 끌었고 본다는 가정의 하에서는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영화에 속한다. 이 영화는 원작 소설이 유명해 도서관에 마침 책도 있어 전부터 일정한 관심을 끌었으나 왜곡이 심하리라는 선입관이 있어 그냥 놔두고 있었다. 같은 가정 아래 영화를 보았으니 책도 한 번 빌려볼 요량이다. 이 사람들에 관한 책은 역시 왜곡이 심하리라는 선입관 아래 피하던 딴 책을 한 번 읽어봤다. 이 영화를 본 소감은 외피를 둘러 불투명하다는 소감이다. 문화적 외피로 한 번 두르고 거짓말로 한 번 더 두른 이중의 외피다. 문화적 외피는 다른 말로 교양이다. 전에 어떤 영화에서 사람을 죽이고 시체를 랩으로 몇 중으로 둘둘 감아서 어딘가에 숨겨 버렸다. 꼭 그와 같은 이미지가 연상되었다. 거기서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궁금했다. 그냥 태워버리든가 묻으면 될 터인데 범행의 증거를 보존하는 것은 이상했다. 그건 영화적으로 그것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즉 죽였으나 영화적으로는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일 죽였으면 반복되지만 태워버리든가 묻었을 것이다. 그게 논리적이다. 이 영화의 외피가 의미하는 것이 비슷하다. 영화를 두른 외피가 의미하는 점은 영화의 대상을 제거할 수 없거나 제거하기 싫다는 것이다. 그 이유에 따라 영화는 끝없이 대상을 왜곡하고 있다. 왜 그러냐면 영화적 외피를 둘러 영화적 사실이 외부로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영화를 보는 내내 뿌연 막으로 영화의 의미를 가리고 있어 원작을 한 번 더 읽어서 좀 더 알아보자는 마음이 생겼다. 책보다는 영화가 표현이 더 직접적이지만 책은 의미의 정세도가 높아 시간을 갖고 나름 분석을 해볼 수 있다. 이 영화를 관통하는 것이 교양 문화로 영화적 외피 구실을 하고 거짓말로 영화적 상황을 다 꾸미고 있다. 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서사라는 명목으로 예사로 거짓말 이야기를 꾸미어 떠들어댄다는 소감이다. 영화가 사실이나 진실을 갖는 매체라는 점은 비교적 오래된 사실이다. 영화적 재미나 감동을 운위하는데 허위적 교양의 늪 속에서 뭔가 잘못 생각하고 느끼도록 오도하는 매체가 영화적 본질의 딴 측면이다. 개인적 카타르리스의 배설 작용을 유도하는 위생이론을 영화 매체의 한 속성으로 말할 수도 있다. 텔레비전도 그렇게 가요도 그렇고 감정이 메마른 사람을 허위적 감정 상태로 몰아 강압적인 감정의 해소를 유도한다는 말이다. 이 영화의 세계는 두 측면으로 나눠볼 수 있다. 이 사람들이 대변하는 구체적 실제 사회와 이 사람들의 영화적 사회로 조금 특수하여 관심을 끈다. 거기가 외피로 밀봉되어 왜곡된 서사 장치를 통해 정화된 이야기의 영상이 공급되었다. 여성이나 세대 간의 이야기가 일부 나오기는 하는데 다 틀렸고 그게 본 글의 이유다. 배우들의 연기는 한 술 더 떠 정형화된 폭력에 가깝다. 연출되어지는 과정에 사실의 확인이 사라졌고 가공의 상상으로 흥미유발만 한다.   


금각사 책소개와서평

이제 당분간 일본소설은 그만 읽을 생각이다. 도합 십 권은 읽었고 더 이상 관심이 가는 작가가 없다. 향후 예상하는 한국 작가가 몇이 있어 그 중에서 작품을 골라볼 생각이고 도서관에 있는 책 중에서다.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는 괜히 읽었나 싶은 생각이 남았다. 아름다운 번역문의 풍요로운 미학을 누려봤으나 그 불량한 이데올로기가 내심 마음에 걸렸다. 소설을 읽으면 잠재적으로 주인공을 올바른 사람으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소설을 읽으며 입장을 이해하므로 설혹 악인이어도 동조하게 되는 문학문의 작용이 있다. 책을 거의 다 읽어나가도록 작가의 궤변에 함몰되어 올바른 가치관에 흠이 간다. 그런 점에서 전에 읽었던 무라카미 류의 공생충의 주인공이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의 와타나베도 다시 생각해보았다. 소설 이데올로기에 취해서 제시되는 사태가 악의 경지이어도 잠재적으로 나의 선량함을 주인공에게 투사해 오독한다. 그때면 소설가의 진정한 의도가 뭔가를 사고하고 소설가가 주인공을 통해 부정적 의미화를 했다고 간주한다. 그 점이 금각사에서는 뚜렷해 소설가의 가치관이 의심스럽다. 다른 작품 중 공생충을 비롯한 무라카미 류의 작품 속의 악행은 한 번 제고할 여지가 있고 노르웨이의 숲을 비롯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속의 내용은 제고할 여지가 더 있다. 보통 사실성을 많이 말하여 세계관 수준에서 악한 사회나 악한 사람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점을 중요하게 간주한다. 평범한 사람의 인간적인 사악함이나 평범한 사회의 일상적 사악함과 같은 것은 소설의 흔한 소재이다. 거기에 정서적 동조 현상을 일으키거나 역으로 그걸 통해 올바른 가치관으로 반대 작용을 일으킨다. 금각사는 병적 주인공의 삐뚤어진 생각과 행위의 연속체를 미학적으로 아름다운 문장으로 포장하고 있다. 뛰어난 언어적 기술을 연마하여 탄탄한 구성으로 주인공의 일생을 벼렸다. 거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묻는다면 소설의 재미를 느꼈다고 답할 수 있다.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작품이 하나같이 표방하는 것이 창작의 자유와 문학적 가치 또는 상술상의 수익성이다. 또 그걸 중심으로 평단은 가치 시스템을 형성하고 거기에 따르면 금각사는 일본 전후 문학사의 가장 훌륭한 작품 중 하나다. 한 사회가 표방하는 사회 이데올로기 중 어딘가에 기대어 이 소설은 56년의 일본 사회를 과거로부터 조명했고 그 작가는 70년에 할복자살을 한다. 뭔가 이상한 알리바이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가치관상의 부정성이 작가의 일생의 부적절함으로 해석되게 사후 작품의 가치 평가가 변형이 되었다. 이 작품은 일종의 파괴적 본능의 전조로 예시 중이다. 불운하게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사후 그 자신의 원고는 신비로운 영기를 빼앗겨 문단의 재생산 구조 속의 상품적 영기를 다시 얻고 그건 바로 주물 숭배이다. 문학 이데올로기를 숭배하는 곳에서 그 사회의 가치관을 반영하도록 예시되거나 일정하게 재생산되는 작품과 작가의 이미지 재생산을 보면 다소간 끔찍하다는 소감이다. 문학을 인간의 영혼에 비유하는 습관이 무색하고 안드로이드로나 로봇으로 새로 구워진 도자기가 어떻게 도공에 의해 불량해서 깨뜨려지는가 알 수 있다.   

P.S

이 작품의 금각사는 자본주의나 미국으로 작가가 상징하고 있다. 패전 후 근대화 과정에서 절은 구사회의 상징이다. 절을 태우는 것은 구사회의 악을 제거하는 과정으로 쓰인다. 또한 작가가 사용한 상징구조로는 밀려든 자본주의나 미국을 제거하는 것이다. 작가는 패전 후 미국을 따라 자본주의 근대화를 하는 일본에서 구사회를 제거하는 플롯을 겉에 내세우고 속으로는 그걸 자본주의(금각)와 미국(아름다움)으로 동일시한 후 제거한다. 


택시 드라이버 영화소개와평론

영화의 반이 넘도록 주인공이 영웅이 아니라 미치광이가 아닐까 의심했다. 대개 액션 영화를 보면 주인공은 영웅이라는 고정관념에 지나치게 사로잡힌다. 요즘 읽는 중인 어떤 일본 소설의 주인공은 실제로 영웅이 아니라 미치광이라는 점이 분명하다. 성선설의 지배를 받는 선악관에 따르면 영웅이 존재하는 사회가 타락할 수 있다. 그게 아니면 악한의 행패 때문에 사회는 피해를 입는다. 후자는 배트맨의 사회관이다. 배트맨은 일정한 서사 규칙 탓에 사회의 사람들은 모진 고생 끝에 정의는 회복된다. 배트맨은 반영웅의 대접을 받는데 이 영화의 트래비스는 그것과 다르지만 또 다른 양식의 반영웅이다. 왜 절반의 영웅으로 취급을 하냐면 성격이 독특하기 때문이다. 슈퍼맨으로 대표되는 대개의 영웅이 고난이나 역경을 겪는 과정이 나오더라도 그 절대적 능력과 권위를 가지며 사회성원이 그의 선을 부정하지 않는다. 만인 영웅을 비틀어 놓은 영화는 예전 어떤 흑인 배우가 출연했던 영화가 생각난다. 절대적 능력과 권위를 가지지만 단지 약점이 있을 수 있고 그러한 설정에 대응하는 악한의 전략은 사실상 인질극 말고는 없다. 힘의 논리로 악한이 이길 수 없는 절대 영웅이므로 그것을 꺾는 대표적 수단이 인질극이다. 인질극을 사용하면 거대한 선의 힘의 실질적 한계가 드러난다. 악한의 행위 규제를 실상 할 수 없도록 악한과 영웅, 사회 성원은 분리되어 있는 개체극이 작동한다. 트래비스가 사회의 부조리에 수많은 시민처럼 절망하지만 너무 무력해 그걸 해결하기는커녕 사실상 그 실상으로부터 격리된다. 논리적인 사회의식으로 무장하지 않을 때 사회 현상은 단지 부조리할 뿐 불규칙한 운동 양식의 일부이다. 그 때문에 영화 전편에서 트래비스의 분노는 개인적인 분노로 내비치지 대자적 사회의식의 결과로 보이지 않는다. 그게 최초에 병리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트래비스의 불면증이다. 그 때문에 트래비스는 야간 택시 운전을 하고 이후 구조적인 사회 시스템의 운동에 접어들고 그것은 결국 어린 창녀와의 만남과 구조로 이어지는 인연으로 나타난다. 마치 행동주의가 시스템철학과 결함한 후의 결과 같은 양식 미학이 드러난다. 그 사이에 트래비스는 선거 운동원과의 데이트, 대권주자와의 만남. 동료 운전사들과의 회합 따위의 인연을 시스템으로부터 부여받는다. 내가 영화의 대부분을 그가 영웅이 아니라 미치광이이고 그의 행위 동기가 대자적 사회 폭력이 아니라 개인적 화풀이로 이해했다가 마지막에 마음을 바꾼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가 사회시스템의 인자이지 진정한 행위의 주체인 행동주의자는 아니라고 보았고 그 증거는 그의 인연과 업의 행렬 때문이다. 미국식 행동주의자는 개체를 넘어 또 다른 인자들과 조합을 형성하고 집단의식을 규정한다. 그게 일부 그의 인연의 행보로 일부 나타나고 그래서 트래비스는 반영웅, 반쪽짜리 영웅이다. 


휴일(休日) 영화소개와평론

1968년 이만희 감독이 신성일, 전지연과 만든 이 흑백 영화를 73분의 길이로 오늘 비로소 감상했다. 요즘 아이들이 싫어할 만한 요소를 두루 갖춘 이 영화는 가난과 젊음의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적으면 혼전 성관계로 인한 임신중절의 수술비가 없어 일어나는 해프닝을 자연적 영상 미학으로 취급했다. 여러 정보를 좀 더 찾았는데 단편 영화라는 표현으로 이 영화를 가리켰고 사회 현실을 부정적으로 재현하여 대단한 검열을 받았는데 그때 잘린 영상 중에 앞뒤의 부분이 시사적이다. 좀 더 정리하면 실제는 단편 초과의 길이이었고 가난 때문에 자살한 남녀의 시체를 발견한다는 전개가 더 있다. 기억이 맞으면 이만희 감독은 만추를 만들었고 이 작품은 두 번 더 다시 만들어져 5공 때 한 번 현빈 주연으로 몇 년 전에 한 번 더 있었으나 원본 자체는 필름이 유실되어 영원히 다시 볼 수 없다. 이 작품에서의 여자 주인공의 얼굴은 요새 어떤 연예인을 떠올리며 몇 장면은 광고의 장면을 떠올리지만 그 사실 간의 관계가 유의미한가를 확인할 수 없다. 기억이 맞으면 전에 훈민정음 해례본을 민간인이 소장 중이라서 완전멸실을 피했는데 혹시 이만희의 필름을 민간인이 소장 중으로 완전공개가 이뤄지면 좋겠다. 우리의 문화 기록물은 간혹 일본이나 해외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개인의 소장권을 국가가 파괴하는 환경아래 뜻있는 개인이 자기 권리를 양보하는 것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장담할 수 없다. 

영화에서는 소개한 잘린 열개의 대신에 새점을 치는 장면이 나와 영화 전체의 복선으로 쓰는 서사 양식이 구축되었다. 그밖에 축약된 대사 대신에 음향과 영상시로 자연적 영상 미학이 구축된다. 그 점은 흑백 영화라서 그 극대화되는데 불투명한 서사성의 시적 영상이 낮은 정세도로 단일한 정보 제공을 한다. 그 잔여적 공간으로 의미의 배태를 벗어난 자연적 사회가 드러나서 그 점이 영화 검열이 두려워하나 파괴할 수 없는 사회 상황 같다. 시간의 흐름으로 60년대 후반의 사회를 지금으로부터 고증이 된 아버지의 사회로 동경 속에 몽롱하게 몰입해도 좋다. 한 사회의 계급 구성이 단일한 모순으로 대학생과 소사로 나뉠 뿐 지배 계급도 피지배층도 보이지 않는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영화의 표현의 자유가 일천한다는 점이며 사회 자체가 꽤 단수적이라는 감상도 든다. 자연적 영상 미학은 촬영기가 실제로 보여주는 것 이외에 일체의 가상이 없다. 가상할 수 있으려면 영화 예술의 자율적 권리가 보전되는 사회를 양도한다. 대개의 유신 이전의 영화가 표출하는 자연적 미학은 사회의 부정적 현실을 진공화를 시킨다. 영상 기록물에 나타나지 않는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고 단정할 수 없으나 그 기운을 수집하면 실제로 사회의 모순상이 단순하다는 기분이다. 고독하고 조용한 과거 사회의 영상이 제공하는 존재론은 강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그 속의 미학이 실제 사회의 허상이라는 점은 좀 더 강조된다. 현대 미학이 소란스럽게 현실을 재현한다면 구미학은 사실의 빙점에 얼어붙어있다. 영화가 재현하는 현실은 어떤 의미에서든 그 자체로 그 시대정신의 재현인데 한 사회의 현실이 실제로 어떠했던가를 더욱 더 궁금하게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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