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 유어 아이즈, 바닐라 스카이 영화소개와평론

<오픈 유어 아이즈>는 1997년 완성한 스페인 영화이고 <바닐라 스카이>는 2001년 완성한 미국 영화로 두 영화 모두 여자 주인공으로 페넬로페 크루즈가 나오고 <바닐라 스카이>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유명한 톰 크루즈이며 여자 조연으로 카메론 디아즈가 나온다. 철자를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페넬로페 크루즈와 톰 크루즈가 성이 똑같거나 비슷한 점이 특이했다. 두 영화의 줄거리는 역할의 설정의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동일하고 주요한 시퀸스의 구조는 <바닐라 스카이>로 가면 줄거리의 명료한 이해를 위해서 일부 교통 정리가 되었다. 거의 동일한 줄거리가 복층으로 구조화되어 남자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줄거리와 이중적인 다른 줄거리로 두 번 감상하는 묘미가 있는데 그 점은 두 영화가 모두 동일하고 <바닐라 스카이>가 후에 만든 영화라서 새로운 점 없이 그 점이 보다 더 명료하다. 첫 번째 줄거리가 남자 주인공을 선호하는 고정 관념 탓에 잘 드러나지 않고 <바닐라 스카이>는 톰 크루즈의 외관 탓에 더 안 드러나지만 잘 감상하면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구조화된 서사 장치를 잘 볼 수 있다. 두 번째 줄거리는 부유한 남자 주인공을 중심으로 일어난 음모 이론의 이야기인데 <오픈 유어 아이즈>에서는 외재적인 이면 서사의 형식으로의 적극적 관객 개입의 결과이고 <바닐라 스카이>에서는 적극적인 기존 서사 구조로 편입된다. <바닐라 스카이>의 이면 서사는 <오픈 유어 아이즈>의 미진하게 전개된 서사를 잘 발전시킨 것이다. 전체적으로 줄거리가 매끄럽다고 할 수 없는데 특히 환생 회사는 보기에 따라 설정이 무의미하여 간단한 다른 줄거리로 대체할 수 있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이런 형태의 서사 구조를 갖는 영화를 2001년 영화에서 찾은 점은 무척 의미가 있다. 이면 서사를 갖는 작품은 대개 매우 간접적으로 그것을 표현하여 <오픈 유어 아이즈> 정도만 되어도 적극적인 관객은 그렇게 읽어보려고 서사 해석에 개입한다. <바닐 스카이>는 거의 노골적인 이면 서사 구조를 열어 놓아 적극적 의미 해석을 안 해도 충분히 자립하는 구조를 갖춘다. 서사 양식이 이중화되는 이유를 과거라면 영화 검열의 힘 때문인 것을 알 수 있지만 희망찬 2001년의 영화에서는 상업적 대중 영화의 의미론적 축조 구조의 심화와 관계 있다. 영화적 성과를 의식하는 제작 관행 아래서는 종전의 시도들을 총정리하면서 그 영화의 성과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공교롭게 어떤 관심 때문에 두 영화를 아주 늦게 다시 다 보면서 늦지만 참 신선한 경험을 하였다. 전에 어떤 한국 영화를 보면서 이면 서사를 갖는 점이 참 신기해 본 이글루스에 글을 쓴 바 있고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는 어떤 영화가 이제야 새삼스럽게 이면 서사를 갖는 구조가 아닐까 생각났다. 이면 서사 장치를 갖는 서사 장치가 그것의 완성 정도에 따라 재분류가 가능하므로 잘 연구한다면 그 완성 정도에 따라 재분류하는 논문을 쓸 수 있다. 이면 서사가 심화되면 완숙한 이중 서사의 구조를 갖출 수 있을 텐데 아직 거기에 이른 영화는 많겠지만 개인적으로 본 바 없다. 한 플롯 안에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이율배반적 서사를 동시 배치하여 가동할 수 있다면 그 만듦새나 짜임새가 높은 수준에 달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데이지의 인생, N.P 문학과비평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을 한 권 더 마저 읽어서 지금까지 총 두 권을 읽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무라카미 류의 책을 각 몇 권씩 읽었기에 이제 세 작가가 되었다. 한 두 명의 작가를 염두에 두고 있어서 각 한 권씩 우선 읽을 계획이다. 내 일본 소설 읽는 계획은 일정한 결실을 거둘 때까지 진행할 계획이다. 최근 갑자기 일본 문제가 불거져 일본 문학에 접하는 데에도 일정한 부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별로 신경 안 써도 될 것이다. 양국 간의 경제적 마찰이 더 심화될지 소강 상태로 접어들지 모르지만 상호 이해 관계에 기반한 새로운 관계로 접어들면 좋을 것이다. 두 작품은 서사 구조가 특히 자극적이고 인위적인 극적 구조가 없어 읽기에 심심했고 그러기에 특별한 감상문에 쓸 만한 내용도 없다. 일정한 서사문을 감상하는 재미도 덜하고 반복되지만 서사 구조도 부드럽다. 처음에 읽은 책은 시간상 오래되어 줄거리 자체도 기억에 흐리멍텅해졌지만 대단히 맑고 순수하다는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 일본 사회의 여러 인상이 자리잡았다. 두 번째 소설은 인물이 여럿 나오는데 일본어를 모르는 탓에 젠더와 역할이 흐리멍텅해 줄거리 자체도 흐리멍텅한 부분이 많다. 성과 이름이 섞인 경우도 있는데 동일한 인물인가를 놓치는 경우도 있었다. 간단한 기둥 줄거리만 겨우 파지했으나 어렵다는 뜻은 아니고 단지 내 독서 경험이 그렇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두 책을 한 데 묶어서 일본 사회의 일단락을 여성 작가의 시도로 조망할 수 있는 기회이었다. 일본 사회는 여러 현상이 개인적 효과로 귀결된다는 인상이었다. 한국에서의 문학이 사회적 효과나 역사적 효과로 귀결되는 현상이 두드러진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렇다면 선진국의 사회 현상은 점점 사회, 역사적 효과가 개인적 효과로 지양되는 일반론을 얻냐면 그렇지는 않다. 대개 사회적으로 개체의 구체적 사례들이 삶의 일례로 두드러지는 형태로 번진다는 점이 중요하다. 한 개별 인자나 소그룹의 삶의 모습이 감동을 주거나 고민거리를 안겨주는 형태의 문학이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개별자가 대표성을 얻어 일반화되는 것과도 조금 차이가 있다. 그저 개별자는 세계의 성좌의 명도와 조도가 어중간한 무수한 별들 중 작가의 이름으로 이름을 얻는 것이다. 왜 그러한 부분에 관심을 가져야 하냐면 사회적 현실이 주인공이 해체되는 세상으로 가기 때문이다. 별로 이름 없는 자들의 개별적 존재의 우연적 존재와 삶이 그 현실 아닌 현실로 사회를 조명하는 것이다. 계급 사회, 대중 사회의 해체가 빠른 식으로 진행 중인 사회적 경향은 결국 어느 지점에서는 우리 사회로도 번질 것이다. 사회의 주인공이라는 부당한 자리매김에 항의하는 작가의 운동은 일정한 지양을 만들 것이고 사회가 사라지는 만큼 빠른 속도로 인물도 사라질 것이다. 존재하는 것의 총체로서의 자리의 곳곳에 무수한 먼지들이 날리고 그것을 우리는 새로운 것의 도착으로 받아드려야 할 지 모른다. 대미를 장식하는 공룡의 죽음과 벌레들의 세상의 우세가 제공하는 사회 정당성의 암시에 객관적으로 적응하고 존재는 무와 같은 터무니 없는 현상으로 변한다. 거기에 약한 것의 미래가 존재하고 우리는 더 이상 연대하거나 단결하지 않고도 사라지지 않아도 된다. 덩어리가 부서져 가루가 되어서 사라지는 역사적 운동의 끝에 존재가 투명하게 깜박이다 꺼지어 가면 우리의 생도 끝날 것이고 그 이후는 남은 자들이나 새롭게 올라 오는 자들이 계획 할 문제이다. 발언권을 버리는 운동의 끝에 역설적인 공평성이 수립되지 않는가라고 추측을 할 수 있다. 그 무렵이면 가난하고 거친 세상에는 태초의 고독이 지배할 것이며 남루한 자유로운 공기 속에서 방독면을 드디어 벗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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