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ay sheep, 혹은 세계를 엿보는 자의 방황 문학과비평


"자네 후지산을 번역해 본 일이 있나?"


도서관에서 가을 문학 강좌가 있었다. 이번 것은 일본 소설의 아버지 나츠메 소세키의 <산시로>다. 강사는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권용선 연구원이였다. 수유+너머는 인문과학 공부를 사랑한는 사람들의 연구공간이며, 고병권, 고미숙, 이진경 등 쟁쟁한 필자로 알려졌다. 당초 별개의 연구공간인 수유와 너머가 합병을 했고, 지금은 구로, 남산, 상도동에 공간을 가지고 있고, N과 R?이라는 이름의 특화한 연구공간도 있다. 권용선 강사는 고려대 산업대의 강사로도 활동하며 국문학 박사다.


도시가 보편적인 장소가 되면서 도시에는 다양한 공간과 사건들이 발생한다. 연구공간 수유+너머도 있고, 도서관의 문학 강좌는 다소 진화한 것 같다. 서울에 여러 공간들이 성장했고 그런 공간들을 다녀보는 것도 수확이다. 수유+너머의 공간 진화는 소개할 만한 사례가 된다(http://www.transs.pe.kr/). 도서관의 진화도 볼만하다. 도시게토의 한 가운데 인문+사회+자연+정보의 요새가 된 것도 하나의 사건이며, 그것이 진화하는 것은 더욱 사건이다. 


글의 제목은 권용선 강의의 제목을 그대로 빌려왔다. Stray sheep은 우리말로 길잃은 양이다. 권용선 강의의 타이틀이며, <산시로>에 등장하는 키워드다. 문학은 단어를 먹고 자란다. 단어는 지도를 그리며 생성하고 생산한다. 그런 구조에서 길잃은 양은 어떤 독특한 수사를 던진다. 권용선의 해석으로 길잃은 양은 기독교의 이미지와 상통한다. 글쎄 그게 맞는가는 모르지만 권용선은 그렇게 이해했고 그렇게 말했다. 나츠메 소세키의 스트레이 쉽(stray sheep: 길잃은 양)은 권용선은의 것과 다르다.


권용선의 해석에는 청춘 앞에 놓인 세 갈래의 길이 등장한다. 그것은 <산시로>의 주인공 산시로의 길들이다. 산시로는 대학생이 되고 도시로 오면서 세 가지 세계를 본다. 1)고향이자 현실도피처인 "멀리 있는 메이지 15년 이전의 향내가 나는 과거" 2)학문과 예술을 은유하는 "도서관, 이끼 낀 벽돌 집" 3)환상이나 연애인 "찬란하게 봄날처럼 꿈틀거리는 (그)곳"


문학은 과학이 아니다. 소설은 영화가 아니다. 농촌은 도시가 아니다. 산시로가, 동일시된 권용선이 그것을 알았음은 짐작할 수 있지만 <산시로>의 세계는 권용선에게, 독자에게 매혹적인 것인가 보다. 난 도시를 좋아한다. 그리고 도시의 건물들, 집들을 좋아한다. <산시로>에는 기차라는 집이 있다. 권용선에 의하면, 고미숙의 <나비와 전사>에 의하면, 기차는 문명(文明)이다. 19세기 도쿄에서, 20세기초엽 조선에서 기차는 문명을 상징했다. 했단다. 


기차는 장소이자 움직임이다. 이광수의 <무정(無情)>에서 기차는 형식의 영채와의 사랑의 매개다. <산시로>에서 기차는 문명을 향한 속도이다. 1)신체의 감각이 소거되고 2)탈것의 교란이 시작되고 3)속도감은 상실되고 4)사물은 후퇴를 시작하고 5)시각은 조작되는 장소가 기차다. 그런게 <산시로>의 기차다.


나츠메소세키는 일본소설의 아버지이자 동아시아삼국 근대소설의 배후다. 이광수도 그 영향권안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 <산시로>를 권용선을 통해 쉽게 배웠다. 이광수의 주요 테마 가령, 기차와 같은 것도 나츠네소세키와 관계가 있고, 그외의 여러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문학이라는 게, 예술이라는 게 국가의 울로 가둬지는 것이 아닌 것이라서 그런 현상을 식민성의 이름으로 재단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그런 것이야말로 어떤 컴플렉스의 결과가 아닌가 의심해 본다. 

** 인용한 그림은 나츠메소세키이며, 네이버 검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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