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에 잠수교가 보인다(1985/송영수)] 영화소개와평론


창밖에 잠수교가 보인다

--1985, 사적기억의 봉인된 것을 풀며..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 콜렉션에는 없는 영화 한 편을 봤다. Blu-ray는 아니고 DVD도 아니며, Divix는 더욱 아니다. VHS포맷의 향수어린 VIDEO로 봤다. 아직 한영자 DB에서도 볼 수 없는 것으로 조사필 낙인이 선명한 것이다. 삼부프로덕션에 Re-editting했을 것으로 추측하며 그래서 극장개봉version과는 다소 상이할 것 같다. FILM은 버젼이 바뀔 때 마다 조금씩 달라질수 있다는 것, 그래서 다를수 있다는 것이 감상의 묘미다. 1985년, 조지오웰의 감시사회로 돌아가 이 필름을 다시 봤다면 아마 꽤 다를 것이다. 그때는 공식적이고 공인된 씨나리오검열과 필름검열이 있던 때다. 그리고 지금과는 필름의 매체에 대한 환경도 다를 때다. 1985년이라면 필름을 위한 매체는 오직 하나 영화관이고 거기에 더해서 중산층 이상에서 비디오플레이어가 보급됐다. 1985년은 한국사회에 아직 비디오방이 있기 전이며 비디오대여점은 유망 자영업 직군으로 등장했던 때다.내 기억이 맞다면...

1985년은 특이한 해다.조지오웰이 예언한 감시사회가 등장한 다음해고,1986년은 서울아시안게임과 건대항쟁으로 특징지어지는 해다. 그 낀 년도가 1985년이며 <창밖에 잠수교가 보인다>가 선보였다. 이 영화에는 시대상과 같은 것은 등장하지 않는다. 80년대 영화의 특징이 그렇듯 알수없는 아이러니는 시대상이 비집고 나오는 유일한 부분들이다. 스케치와 거리의 풍경, 장소들의 모습 등만이 시대를 일부분 반추시킨다. 음향과 대사도 여전히 봉인되어 있다. 시각적 인식은 물론 청각적인 인식과 그밖에 여타의 것에서 거개서사로서의 1980년대는 실종됐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라는 현시점의 생각을 하게도 된다. 그러나 영화를 사료와 자료의 하나로 간주한다면 영화에서 얻을 수 있는 게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80년대를 거대서사라고 할 수 있다. 80년대는 80년대를 주도한 사람들에 의해서 각본지어지고 촬영됐다. 영화의 제작과 관련해서는 어떠어떠한 조건들이 있을테다.사회와 역사를 이해하는 일정한 시선에 의해서는 80년대는 그러그러하게 이해됐고, <창밖의 잠수교가 보인다>와 같은 작품은 영화사의 주변과 외부를 배회하는 그렇고 그런 작품이다.

<창밖에 잠수교가 보인다>를 본 이유는 기억 때문이다. 이상한 제목이 가진 오래된 기억에 대한 각인과 또한 특이한 노래,노랫말...그런 것은 오래 기억된다. 그리고 그건 의미가 될 수 있다. 영화를 보니 이해하기 딱 좋은 줄거리와 적당한 잔재미들, 그리고 무엇보다 음악이 들을 만 하다. 귀에 익어서 기억된 것들이 계속 나온다. 이런 것에 대해서 꼭 해석을 한다면 대단히 주관적인 것이 될 것 같다. 그렇게 개인의 것을 다 노출하고 싶지는 않다. 사적기억과 취향도 상품화가 되는 선진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적인 것의 봉인이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창밖에 잠수교가 보인다>는 환기력이 대단한 영화다. 기억의 바닥에 놓인 침전물에 대해 마치 어항을 저을 때 처럼 다 일렁거리게 한다. 그런 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사적기억은 사실 개인들 마다 다르며 공유점을 가진다 해도 서로 다른 면이 크다. 환기를 시켜도 소환되어 돌아오는 것은 서로 다르다. 이런 형태의 관람이 가능한 것은 극장이 아닌 공간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고, 그런 류의 영화가 이 무렵부터 시도되지 않았나 추측해본다.

사실 이것은 당시 1985년의 한국적 매체조건과도 조응한다. TV가 그런 매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며, 결국 그것은 비디오플레이어와 비디오, 그리고 특정한 공간적 조건에 의해서 성취될 수 있었다. 그런 것은 역시 영화제작의 조건으로 편입되어 들어간다.그런 때에는 그런 영화가 등장한다. 조건에의 조응이 순조롭게 성취된다면 말이다.

불행히도 타임머신이 없어서 1985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 때를 알려면 손쉬운 다른 방법을 택해야 하지만 역시 복원되는 역사이다. 말하자면 재구성되는 것이다. 그럴 바에야 자유로운 생각의 힘을 빌리는 편을 택한다. 아무도 내게 확인하지는 않고 내가 그것에 책임질 필요도 없는 조건 때문이다.


2.영화적 디테일에 대하여.

영화는 디테일의 예술이다.그만큼 세세한 것의 위력이 위력적이다. 미장센이라는 영화용어도 있지만 디테일에 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디테일에 숨어있는 뜻을 알기위한 노력은 영화를 이해하려는 노력 그 자체이다. 그런 것, 디테일에 대해서 알아본다.그것도 [창밖에 잠수교가 보인다]에서 알아본다.

오래된 서양격언에 "악마는 디테일 속에 숨어 있다(The devil is in the details)"라는 것이 있다. 여기서 디테일은 세부사항이라는 뜻이며 중요한 승부는 디테일에서 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영화 역시 그렇다. 디테일, 영화적 디테일에 영화의 전체를 죄우하는 것이 숨어 있다. 이 말은 "Wag the dog(꼬리가 개의 몸통을 흔든다)"라는 표현으로 틀어볼 수 있다. 부분이 전체를 좌우하는 것이다. 영화적 디테일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영화에서 아주 에로틱한 키스장면이 등장한다. 내가 적는 영화적 디테일과는 거리가 있지만 너무 좋아서 소개한다. 윤희(김진아)의 정사장면의 도입이지만 윤희의 입이 익스트림클로즈업되고 이어 그 입술은 상대를 입술로 짙게 애무한다. 모니터의 거의 전부가 입술과 입술들의 행동으로 차고 입술들은 말을 하는 것 같다.굉장히 에로틱한 게 색도조차 익숙하고 전형적인 선홍색 계열들이다. 먹는 입이 말하는 입이 되었다....

영화적 디테일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1)지나칠 수 있으나 의미화될 수 있는 컷들, 부분들이다.영화의 내러티브에서 보면 동떨어지고 하찮은  것들이지만 영화전체에 분위기작용, 의미화/기호화 작용을 하는 것 같다. 영화를 이해하는 데에 접속사나 조사와 같은 것이라고고 하겠다. 영화를 언어에 비유하면 명사나 동사가 중요하지만 접속사나 조사가 없이는 아름다운 문장, 완결된 문장이 될 수 없다는 것과 비슷하다.

2)다른 하나는 위의 키스장면과 같은 것들이다. 영화를 보고 기억할 때 매개가 되는 것. 또는 영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내 기억에 남는 것들.내러티브의 지배에서 벗어나며 독립적으로 중요한 것이며 미학적인 것, 장면. 푼크툼인가?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루시다에 나오는 그 용어가 나타내는 것과 같다. punctum! 이것조차 영화적 디테일이라는 표현으로 먹어치우며 영화적 디테일을 설명한다. 그것들이 영화적 디테일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아주 존중되야 한다. 영화는 단지 내러티브 따위 이상이다.
  


3.이 영화를 어떻게 해석해볼까!?
나름대로..ㅎㅎ

강남과 관련한 사정은 80년대 영화에 종종 등장한 모양이다. 어떤 영화에서도 봤고 다른 영화에서도 봤을걸.어쨌든 꽤 등장한다. 80년대는 강남의 사정이 전고점을 찍은 때라서.. 강남은 한국과 서울 사정의 정점인가? 63빌딩은 여의도에 있지만 63이 강남변 어디에 있는 듯 데쟈뷰가 보이곤 해. 그래서 강남은 우리 가부장제의 또한 정점은 아닐까? 농촌이 아니라 서울에 정점이 있다는 것은 당연하지. 그래서 강남은 한국 가부장제의 정점이며 상징적 거소다. 그런 걸 설명하는 것들이 80년대 강남영화에 등장하고 [창밖에 잠수교가 보인다]를 그렇게 해독하는 것은 내게 착시를 늘 일으킨 것과 같다. 이 영화의 당대적 세련성, 감각성이 진보성/좌파성과 혼동을 일으키는 부분이기도 해.변명을 한다면 내 진보성/좌파성은 내겐 중요한 테마지만 객관적인 진보성/좌파성과는 전혀 관계없지.^^내가 쓰는 아이의 언어니까.

그래서 [창밖에 잠수교가 보인다]는 분명히 한국적 가부장제와 관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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