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다빈과 죽음, 인간 자유에 대하여.. --피메일페르소나



지난 2007년 2월 10일에는 슬픔이 있었다. 한 유명한 여성 배우가 생을 스스로 마감했다. 그 이후로 또는 그 전으로 해서 많은 죽음이 이어졌다. 지금도 그 진행형은 멈췄다고 말할 수 없다. 죽음이 광범위하게 번지는 것은 최근 노무현 대통령의 것으로 해서 정지되려나 했지만 그런 것 같지 않다. 죽음이 문화와 생활의 전반으로 번져서 기실 내 기억회로는 이해하고 기억하는 것초차 힘들었다. 그런 죽음이 이번 2월 10일이 되면서 웹세상에 다시 알려졌고 다시금 기억해냈다.

정다빈의 죽음이 특히 기억난 것은 그녀의 한 MV때문이다. 아주 인상깊있던 뮤직비디오의 감상 후에 그녀의 죽음이 있었던 것 같다. 이미지들을 통해서 친구가 되었다고 믿었던 사람의 죽음은 특별했다. 양가감정마져 일어났다. 이미지와 기억을 통해서 소유할 수 있는 자의 죽음은 결코 슬프지 않다라는 어떤 믿음이 작용했던 것 같으며, 실질적 만남을 통해서 겪지 못한 사람의 죽음에서는 그 비극성조차도 사물화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허상과 현실감이 병존했다.

하여튼 정다빈의 죽음은 슬프다고 말 할수 밖에 없다. 난 그녀를 직접 알지 못했고, 내게 남은 그녀의 유상은 말없는 맑디 맑은 미소뿐이다. 이미지들로 기억으로 남지만 역시 슬프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난 이런 비슷한 죽음을 몇몇 더 안다. 그것의 일부는 누구나 다 아는 최근새의 자살 사건들이고, 또 다른 일부는 대학때 알았던 어떤 죽음 그리고, 책을 통해 알았던 죽음 몇몇이다. 공요롭게 여성의 죽음이 전부였다. 그리고 여성의 죽음은 이상하리 만큼 강하게 각인되고, 멜랑코리하게 만든다. 그건 나의 사회적 젠더가 남성이고 이성애자라서라고 생각한다.

정다빈의 죽음 이후 많이 붉어졌던 것중의 하나는 연예계라는 곳에 대해서였다. 그곳의 질서와 룰, 관행같은 것이 여기저기서 삐져나오듯이 붉어져나왔고 난 그것들이 그 죽음과 상관이 있다고 생각했다. 공식적인 보도에 의한 설명을 별로 흘려듯는 내 습관은 여기서도 유효했다. 이렇게 제도화된 보도를 믿지않는 습관은 여러 곳에서 장애를 낳기도 했다.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소통이 마비된 듯한 느낌, 특히 그 죽음에 대해서는 일방적으로 설명하거나 일방적으로 듣거나 하는 둘 사이의 선택이였다. 그것은 하지만 더 싫었다.

각설하고, 정다빈의 죽음을 생각하면 인간자유에 관한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목숨은 자기 것이고, 자신이 그것의 주인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과, 남겨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 하는 책임감에 대한 것이 대립했다..... 한국 사회에서 죽음은 슬픈 것이다. 많이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위해서 참으라는 것을 말 할 수 밖에 없다..... 여기엔 기실 다른 질문이 하나 꼬리를 문다. 소외되고 알려지지 않은 외로운 죽음들에 대해서는 뭐라고 해야할까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만약 그들도 죽음을 생각할 때 누구를 생각해야 할까? 고립된 사람에 대한 이미지는 날 슬프게 한다. 

정다빈의 죽음은 이제는 진정 그녀에 것이 된 여러 이미지와 또 기억들을 통해서 가끔 떠오른다....미소가 여유로우면 가슴속까지 여유로울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 같다.... 늘 생각하는 몇몇의 내 고정관념대로라면, 죽음에 이를 때는 인간 자유의 억압과 관계가 많다. 여성(연예인)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또다른 이유들로 인해서 자유롭지 않았을런지 생각한다. 자본주의에서는 인간의 삶이 부식되고 그 자유마져 억눌려질 소지가 많다. 이성이 있는 인간은 그런 것에 대해서 민감하고 반항한다. 그 반항은 삶의 폐지가 아닐까? 조울증, 우울증 따위의 이름으로 돌려지는 그 죽음들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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