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시위(대)...봉쇄도시 '고담'서울論 --새는양날개로난다

집회와 시위는 같은 현상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싫지않다. 하나에 서로 다른 이름이 붙는 건 흔한 현상이고 그 자체로 세태와 입장을 반영한다. 그것을 집회로 본다면 당신은 민주주의자다! 그것을 시위로 본다면 당신은 쫌 보수적인 입장이 아닐까? 오래전 시위로 불리던 것이 집회라는 이름을 얻었고, 지금은 두 이름이 격돌을 하고 있으며, 또다른 이름들도 등장했다.

촛불, 금지, 행사, 행위극, 기자회견 등이 그것이 아닐지? 언어는 그 자체로 격전의 장이다. 어떻게 네이밍을 하는가가 바로 그 입장의 승리를 표시하는 증거와 같다. 참일까? 거짓일까? 역시 엇갈릴 수 밖에 없지만서도 아마 지기는 싫은 것이 서로 상이한 입장들의 또다른 입장일 것 이다. 

지기 싫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사안에 대한 어떤 특수한 표현일 수는 있다. 베트남전에 대한 평가를 할 때 세계사교사라면 전쟁의 범죄성을 말할 수 있고, 어린 학생였다면 지기싫어하는 인간의 속성을 말 했을 수 있다. 어쨋던 입장차는 그렇게도 드러난다. 다시 집회/시위로 돌아가면?

서울은 봉쇄되고 있다(Seoul has been blocked). 명백한 민주주의의 후퇴다. 어느새 집회는 공포의 시위(대)로 둔갑했다. 마치 태국의 레드셔츠와 동일시되는 듯 하다. 태국 시위대가 저지른 여러 과잉들을 우리 집회가 답습할까? 만약 집회가 '폭력시위'로 과잉하는 것을 기다리는 자는 없을까? 집회에는 의미의 격전이 있는 것 처럼, 정치의 격전 또한 있다. 불법을 갖다대기 전에 그 자가 바로되어 있는가 궁금하다.  
 
1)
현재의 집회를 쫌 살펴봤다. 한겨레21 808호에서 네 부분을 임의로 켑쳐했다. 각각 현재 집회의 서로 상이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부분들이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들'이 유의미화하는 것과는 달리 많이 방어적이고 수세적인 것이 요즘 집회의 특징이다.






















2)
집회의 과거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는 '1996년 한총련 연대사태'가 있다. 이 사건은 워낙 프로파간다/정치선전의 목적으로 많이 활용돼 이 사건을 보거나 겪지 못한 사람들도 뭔가 어렴풋한 악몽으로 기억되며, 또 어떤 사람들에겐 고난의 트라우마로 원기억의 저변에 깔려있다. 슬픈 기억이다.  

3)
미래의 서울은 어떻게 될까? 집회를 빌미로 철저하게 봉쇄되는 도시가 되지는 않을까? 이미 봉쇄의 조짐은 여러 차례 엿보였다. 엿보는 자의 눈엔 생각보다 많은 게 보였다. 스스로를 관찰자로 정의하면서 보는 서울의 세상은 나빠지고 있는게 명백했다. 도시와 공간이 봉쇄로 잡혀들면 그 사람들의 의식 또한 봉쇄당하고, 억압당한 무의식은 따로 요동치지 않을까 우려된다.
 
위 상상화는 유명한 두바이(Dubai)다. 2010년 NLR의 기사에서는 두바이를 다뤘었다. 모든 종류의 민주적 의사표현이 차단되는 그곳을 자본가들은 '천국'으로 선전했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조짐과 예측이 점처지는 지역들이 있는 것 같다...미래에는 서울이 그런 대표적인 봉쇄되고 차단된 도시가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우려와 걱정은 예정된 운명의 경로를 이탈시키는 힘이 될지..

4)
집회.시위가 산업화.자본화되는 로보캅'디트로이트'도 어렴풋이 생각해 본다. 로보트가 치안대책으로 나서는 도시엔 도대체 어떤 형태의 집회.시위가 보장될까? 집회.시위도 로보트를 동원해 해야 인간의 권리가 지켜질 수 있을까? 아니라면 뭐가 남을까? 어떤 형태의 민주적 의사표현조차 봉쇄되는 그런 미래가 노정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

그런 디스토피아의 미래상들만 그려지는 암울한 밤이다. 집회꾼도 진압대도 자본의 '역능'에 봉사하게 구조화되고 도시화되는 게 서울의 미래가 아닐까? 난 그런 숨막히는 도시에서 계속 살아야 할 운명은 아닐까? 일련의 '역행'하는 조짐들을 보면서, 느끼면서 문제의 심각성을 최소한 공유해보고자 포스팅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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