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ells like teenager...애같은 느낌인데... --자화상

명동의 pm11:00은 철시에 여념이 없는 부산한 느낌였다. 옷,화장품 매장은 거의 셔터를 내렸고, 간혹 쇼윈도우에 꽃단장한 마내킹만 미소를 졌다. 화장품 가게 몇 곳은 열려있었다. Nature Republic은 세일에 돌입한 것 같았다. 50%나 세일한다는데 쓰든게 남아서 그만 돌아왔다. 같은 브랜드가 같은 명동에 세 개씩 있는 경우조차 있었다. 워낙 상권이 좋으니 그럴 수 밖에..

계속 Nirvana노래 생각만 했다. Smells like teenager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틀렸다. Smells like teen spirit였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서로 상이한 제목 번역이  등장했다. 1)10대 영혼의 냄새가 물씬 나는.. 2) Teen Sprit(탈취제상표이름) 냄새가 나는..3)젊은이들 생각같은 느낌인데..를 옮긴다.

'teen'이 고어로 '슬픔(grief), 비탄'이라는 뜻이 있고, 'smell'이 '냄새나다' 외에 비유적으로 쓰여 '..한 데가 있다'라는 뜻이 있으니 '비탄스러운 기운이 느껴지는 데가 있어'로도 번역해 봤다. 어쨋거나 그런 비탄스러운 10대. 이렇게 느끼는 것도 기실은 아주 정형화된 인식이다. 10대가 기회의 때는 아니라도 가장 풍요로운 시대의 그때는 뭐든 해 볼 수 있으나 책임질 필요는 없는 행복한 시절
은 아닐까? 

10대 때 가장 큰 미래에 대한 가장 큰 고민은 어른이 되면 방학이 없다는 인식였다. 그게 그랬다. 책임질 게 없었다는 인식은 사실은 아니다. 잘 회고해 보니 그 때도 책임질 게 많았다. 가령 성적 같은거..어쨋던 여러 책무에서는 면제되어 있었다. 경제문제, 배우자, 자녀, 투표, 세계평화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내 일이 아니니까. 그럼에도 여전히 그런 걸 그리 심각하게 생각치 않는 게 10대를 벗어나서도 그러니 그런 10때의 일부 인식도 잘못 돼 있다. 역시 '방학'만 고민하면 된다.

'젊음'은 방학과 함께 저물었다. 젊음이 사라지는 시점에 함께 사라진 것 중 하나가 '방학'이다. 만일 학교를 배경으로 성인이 됐다면 '방학'이 있었을까? 그 단어가 작용하는 자장은 아마 그대로 일지 모른다. 꽤 긴 시간을 부담없이 쉴 수 있다는 거. 그게 방학의 본질이므로. 그런데 그게 그렇지 않았을거라는 생각도 한다. 

pm11:00 철시하는 명동의 밤에서 누리고 느낀 자유로움은 이미 내일이면 일터로 복귀한다는 짜증에서 출발했다. 방학이 있었다면 이런 자유로움은 만끽하지 못했을 것이고, 설혹 방학이 있었어도 그 느낌은 많이 퇴색했었을 것 이다...젊음이 졌다는 것이 노인이 됨을 말하지 않는 것 처럼, 그렇게 느낄 수 없음이 방학의 가치를 전면부정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10대, 20대가 아니라는 인식은 '방학'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도전정신을 불러일으킨다. 삶에 다시 '방학'을 불러오고 싶다. 짦은 자유로움이 찰나적인 즐거움을 통해 고달픈 현실을 망각시키는 장치라면, 회복된 방학은 진정한 자유로움을 채무면제상태에서 제대로 즐기는 것이다. 그런 방학을 회복하고 싶다. 

그런데, 삶이 그렇게 호락호락치 않았다. 않았고 어렵다. 참 어려운게 삶이다. 삶이라니. 그렇다. 그렇고 정말 그렇다. 아휴. 정말. 힘들다. 그렇지만 그리운 게 항상 있나 싶다. 그래서 방학이였다. 이젠 잊어야지. 애같은 느낌을 버리려면 이런건 버려야지. 정말 달라붙는 느낌인데. 항상 엉겨붙는게 이거다. 애같은 느낌인데....

당초 팝을 즐겼다면 이런 자의식과 관련이 깊다. 야시장을 걷고 너바나가 궁금하고 얘같은 느낌을 의식하고. 뭐 그런 것들. 그런게 팝이다. 락도 아니고 메탈도 아니며, 2pm은 절대 아니다. 팝을 즐겨 꽂고 팝을 즐겨 접속하고 팝을 즐겨 읽고 팝-버거를 즐겨 먹고 거리의 파머한 걸을 즐겨 보고. 그리고 나머지? 그런 건 팝이 아니다.

늘 머리를 뜯는 건 얘같은 느낌! 그게 정말 싫다. 그런 눈으로 보는 건 싫어. 난 월래 그래. 얘같은 느낌. 정수리에 맴도는 환청. 어디선가 들은 그 목소리가 맴돈다. "애같은 느낌인데"...사실을 말하자면 국가와 사회와 관련이 깊다. 이렇게 애가 되버린게 그렇다. 어른이라면 '책임'을 보통 말하지. 어른이라면 '구속됨'을 말하지. 부정적이지만. 근데 면제에 유예상태지. 그렇다고 진입되는건 아니지. 이런 어정쩡함.

내게 선택을 하라고 하지마! 소녀시대 노래제목의 명령문같다. "소원을 말해바" 이 긍정소망문은 사실 행앞의 부정소망문과 같다. 같은 구조다. 국가와 사회가 내리는 주문(order)은 어느쪽일까? 혹여 영원히 피터팬이 되어버리라는 가혹한 주문(enchanting)은 아닐런지. 국가와 사회를 가혹한 '엄마'로 비유하자면 어떤 메세지를 내게 말할까? 엄마의 소망은 어느쪽일까?

난 항상 "맑시즘"의 틀안에서 사유한다. 그게 아늑하다. 익숙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면 이건 항상 "호출(interpellation)"에 관한 것이다. 국가와 사회는 '날' 어떻게 날세워 부르는가! 국가와 사회가 호출하는 건 항상 예리하게 날선 칼 같다. 거부할 수 있을까? 이런게 물음이다. 국가와 사회가 호출하는데 거부할 수 있을까? 거절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 오래전 학교에서 선배들은 그렇다고 했다.

가끔 알았던 후배들은 그럴 수 없다고 했다. 너무 정형화되었나? 하여튼 동료와 동기들은 그런 건 잊어먹으라고 했다. 기실 내 동료와 동기사회에서 이런 걸 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어찌보면 또 다른 "호출2(interpellation2)"에 걸린 셈이다. 전자가 '아빠'의 것이라면 후자는 '엄마'의 것이다. 아니면 전/후자가 바꼈나? 하여튼. 이런 관계쌍안에서 난 쌍방의 호출을 동시에 받는 셈이다. 

어느쪽이건 난 한쪽에 대해선 '거절'에 대한 고민을 한다. 역으로 다른 쪽에겐 '아늑함'을 두려워 한다. 인간을 굉장히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거절'이 중요할 때 회피한다. '아늑함'에 대해선 두려워 하나 누린다. 물론 쫌 다르거나 반대형태의 사람도 있다. 하여튼 난 전자를 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쪽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살기 바란다. 

대학때 진정 '애같은 느낌'의 친구가 있었다. P.H.다. 게가 그랬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그리고 또 하나를 말했다. 스위치가 두 개있는데 하나는 '따스하고', 다른 하나는 '차갑다고'. 두 스위치는 인생의 스위치다. 난 따스한 쪽을 택했다. 뜻밖에 P.H.는 차가운 쪽을 택했다. 어리숙하게 나는 P.H.가 항상 지지햇던 따스한 스위치를 선택했고, P.H.는 의외로 차가운 쪽을 택했다. 그런게 인생이라면.

그리고 우리는 인생의 갈림길에서 서로 다른 길을 갔다. 난 따스한 스위치가 지향했던 방향으로 갔고 P.H.는 차가운 스위치가 지향했던 방향으로 갔다. 그런게 인생이라면. 참 쓸쓸했다. 철학의 길에선 늘 이성이 감성을 앞선다고 했다. 서구철학의 전통은 늘 로고스(이성)가 파토스(감성)의 우위에 있다고 가르쳤다. 늘 궁금했다. 이렇게 하는게 가장 손쉬운 선택일까? 전통과는 달리 다른 길은 이미 있을지도 몰랐다. 

명동의 밤은 어둡다! 명동의 어두운 밤길은 걸으며 생각하기 좋다. 그런지 명동엔 밤에 자주 간다. 아이팟이 있다면 늘상 너바나를 들을텐데. 그렇게 듣는게 세련된거라고 했다. 하여튼 명동의 밤은 어둡고 아이팟은 너바나를 위해 꼭 필요할 것 같다. 그렇게 듣는게 세련된거라면. P.H.가 다른 길에서 뒤를 돌아보면 말하는 듯 쟁쟁하다. P.H.는 목소리가 우렁찼다. 애같은 느낌으로.

명동의 야시장을 홀로 가면 너바나를 듣고 싶었다. 그럴 때면 상상을 했다. 난 거기서 홀로 객석에 앉는다. 무대에서 너바나는 노래를 부른다. 애같은 느낌인데.난 이 번역이 더 좋다. 마치 동정받는 느낌이다. 그래도 좋을까? 아직 도저히 벗어나지 못하는게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고민스러울까? 잘 모르겠다. 그런 내가 도저히 벗어나지 못하는 것들. 그런 것들. 피 묻은 생리대 처럼 달라붙는다. 남자라 잘 모르지만 그렇게 표현해야 마땅할 것 같은 생각. 

더러운 명동 길은 늘 더욱 더러워지는 것 같다. 그런 길을 가면 수치감이 인다. 이런 것은 보편적인 느낌이다. 나랑 관계없지만 내 일 처럼 느껴지고 때론 한심했다. 왜 이런 걸 생각하게 되는지. 마치 자동기계 처럼 되풀이되는 현상들. 물론 난 미치지 않았고 정상이지. 자동기계가 기억을 움직이고 무언가 재생되는거. 보편적인 느낌이나 사실 작 인식되는건 아니다. 이런 작용은 잘 인지되지 않는게 보편적이다.

어떤 영화의 소재에서는 주인공이 고통받는다. 그걸 자동기계가 재생하는 기억이라고 생각했다. 영화는 압축적이며 극단적인 생각을 보여준다. 그런 측면에서 올바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예술은 원래 그렇다. 그건 사실적이라고 하되 사실이라고 할 수 없다. 자동기계에 대한 인상은 많은 것을 설명한다. 그 영화에서 그런 인상을 얻은 것은 사실 큰 수확이다. 자동기계와 기억.

인간세계엔 아주 많은 신호들이 있다. 정도가 심한 경우엔 언어, 기호 따위도 신호로 변경된다. 그러한 신호들이 자동기계와 관련이 있다. 신호가 인간을 키우고 만들어 갈 때 인간은 자동기계의 지배를 받게된다. 자동기계는 역사속에 존재했던 것이다. 내 글에서 그것은 추상적 매커니즘이자 기억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때론 자동기계가 인간을 위해 동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특히 역사와 사회가 크게 움직일 때.

많이 연역하면 역사와 사회자체가 자동기계 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것은 기억을 움직이는 자동기계가 된.다. '되기'는 여러 매커니즘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걸 굳이 다시 재론할 필요가 있을까? 없을 것 같다. 다만 자동기계를 설정함은 글을 쓸수록 자명해지는 것 같다. 그러한 설정은 아주 많은 걸 손쉽게 설명할 수 있다.

너바나는 죽었다. 자살했다. 이런 것은 늘 암시를 건다.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는 암시. 암시를 거는 것이 체제인지 너바나인지 불확실하다. 어쩜 다른류의 체제가 이런 암시를 건다고 생각했다. 건강하다고 말할 수 없는 사고.사색들이 늘 부유한다. 어쩜 철학자라고 암시걸렸나 보다. 너바나와 너바나의 죽음이 그런 불행한 암시를 걸었다고 한다면 사실 믿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꾸준히 몇몇 생각을 하게 된다. 관심사의 문제로 치부하지.

너바나는 노래와 죽음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불행한 죽음이 너무 많았던 시대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 어쩜 가장 인간다운 것이리라. 타자의 죽음을 내 안에서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어쩜 가장 아름다운 것 이리라. 오늘 어느 미학자의 인용을 읽었다. 어떤 죽음들에 대해서 말했었다. 말이 거친 것 이상이라는 '암시'가 가득했다. 나라면 미화했고 내 입장을 지켰을 것이다. 이런 경우는 허다하다. 입장을 지키기 위해서 입장을 버리는 것으로 이해했다.

너바나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이미 오래됐고 국경마저 넘었기에 어떠한 입장과도 관계가 없어졌다. 그럼에 그럴 필요가 없다. 예를 드는 방식은 나쁘다. 본디 뜻과 의도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누구의 죽음에 대해서 어떤 방식으로 말할 때 '공동체'가 이미 부가한 약속을 지키기와 그렇지 않기는 항상 대립한다. 어느 쪽을 선택하는 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거기에 또한 '약속'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선택을 넘는 '약속'의 문제. 다른 말로 '규칙'이라고도 했다.

결국 이런 것은 '체제'에 대한 인식과 연관이 있다는 생각이다. 거의 반복적으로 사회문제화 됐고 향후 수시로 점화될 수 있는 이런 문제는 체제인식과 연관된다. 차라리 체제인지라고 말하고 싶다. 약속돼도 해체당하는 체제의 것. 그것들이 연결되고 결합되는 방식. 여러 체제가 서로 연결되고 결합되는 방식은 늘 문제를 일으킨다. 그 누구 개인탓으로 돌릴 수 없다.

** 벗 P.H.의 추억은 가슴을 도려내는 것 같은데가 있다. 명치에 치받아 잘 내려가지 않는 체증. 그런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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