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ke break make...개인의 초상과 자유주의 --방통컨버젼스와광고

돈가지고 장난 말랬다...모카드회사 일련의 광고캠페인이 눈을 끈다. 개미가 된 개인(시민)은 금융자본이 부과한 통로와 실험을 경유하며 성공적으로 소비하고 있다(돈쓰고있다). M은 중간계급(the Middle class)의 두문자(initial)은 아닐까? 추측은 개미의 통로처럼 확인할 바 없는 미로를 헤맨다. 광고엔 전기충격이 등장했다. 충격적 스케치다. 전기쇼크에 개미의 뇌는 재활성화되었나? 단절된 통로를 점프했다... 개미, 자본주의 사회 개인의 초상이며, 또다른 이름이다.  

break make break.. 기존카드 뽀개고, 새로 만들고, 또뽀개고.. 카드사로 넘어가는 건 얼마없겠지만 뭔가 권력관계, 헤게머니관계가 독려되는 느낌이였다. 성공적인 개인의 자율적인 삶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적으로 진화한다. 2010년 한반도에서는 개인이 탄생하고 있다. 오랜 집단주의 문화에 질식했던 사람들이 개인과 시민의 이름으로 성공적으로 진화한다. 일련의 광고캠페인은 성공적인 자본주의 신화 한 대목을 상영하고 있다...궁극의 시기가 오면 12봉인이 열린다 했다. 자유주의자를 묶어놓았던 봉인 하나가 풀렸다.

80년대 사상과 이념의 화두가 '평등'과 '사회'에 대한 것이였다면 2000년대가 접어들면서 '자유'와 '개인'에 관한 것으로 변경됐다. 원래 이념과 사상은 공명하는 법이다. 구체적인 현실의 변화에 조응하거나 되려 구체적 현실을 이끄는 경우조차 있다. 어느 것이건 '자유'와 '개인'의 주제는 윤리적 도덕적 결정과 판단과는 별개로 중시되었다... 매캐한 대기 중에 청명한 햇볕이 내리쬐는 환상을 보는 듯 하다.,,가능하면 누적된 것은 부수지 말고, 새로이 만든 것은 또 누적시키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1)
현대캐피탈은 어떤 대표'처럼 보인다. 기업을 잘 안다면 이렇게 하지 않겠지. 잘 모르는 시점은 항상 주류와 시차를 만든다. 그런 시차와 차이는 또다른 입장이다. 민주주의는 의견의 다양성을 존중한다. 헌법정신이다! 바로 거기에 개인과 자유주의는 또한 근간을 뿌리내리고 있다. 어쩜 이미 공통의 뿌리는 너무 오래됐을지 모른다. 어떻게 해야할까? 너무 오래 다른 길을 간 사람들.

방법은 두 가지다. 다시 공통의 뿌리를 확인하는 것. 아님 어느쪽이건 갈라내어 다시 '이식'하고 '식목'하는 것. 현실은 사실 그 '중앙값'을 전혀 찾지 못했다. 서로 칭칭얽혀서 갈등한다. 뱀대가리 두 개를 본 적이 있는지? 아래는 알 수 없고. 구름을 뚫고 승천한 뱀대가리 둘은 칭칭꼬여서 다투고 있다. 목적없고 지향없는 다툼. 그런 곳에 우리의 '용맹한' 개인이 있고 자유주의가 자리를 잡고 있다. make break make

이미지가 진실을 말할 때 로고스는 거짓을 지적한다. 영상에 거꾸로 맺힌 것은 누군가의 눈물이라고도 한다. 거짓과 눈물이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솔직히 스스로 모순같다. 그럼에도 존재하는 많은 것들. 그저 있는 것들. 이미지가 왜곡하고 곡해하는 것의 진실이다. 어차피 직진하던 것이 정지할 때는 어떤 형식으로건 왜상을 만든다. 이미지의 거짓을 까발릴 때는 스스로가 자동기계처럼 산출하는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make break make

최근엔 한쪽만 남았다. 어느쪽인지 불명료하다. 둘이 있을 때 어느쪽을 선택하건 다른 하나는 속임을 당한다. 만들거나? 부수거나? 그런 선택을 솔직히 알 수 없다. 이유도 모르려니와 결과는 더 모르겠다. 왜 그런 선택을 반복하는지. 개미가 가는 길을 어떻게 생각하나? 자신이 만들었다고 생각하나? 신이 부수지 않으려리라고 생각하나? make break make

이미지를 지지한다. 그럼에도 늙은 철학자의 노파심은 무시할 수 없다. 언듯 개인의 운명에 대해 비슷한 충고를 하려는 충동이 춤춘다. 그렇게 파동처럼 진동하는 빛의 찬란함. 떠오르는 광휘. 두 사람은 같은 사람일까?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이면의 부조상일까? 어쩜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나. 이 단어는 잘못치면 '바로보다'가 된다. '바라보기'와 '바로보기'는 잘못했을 때만 같은 뿌리를 확인한다. 그런게 人生일까? dlstod?

2)
언어는 가치를 내재한다. 니체는 그걸 '도덕'이라고 했던 것 같다. 하여튼. 그럼에 말하지 말아야 할까? '더욱' 말해야 할까? 이렇게 내는 Yes/No question에 대해서 어떤 평론가는 집요하게 지적을 했다. 난 그 사람의 그 말을 존경한다. 더구나 그러한 지적의 대상이 아주 유명하고 고명하며 양심적인 법률가(변호사)라니. 그 패러독스. 그렇게 퀴즈를 내는 측과 푸는 축은 나뉜다. 그게 세상이다.

요즘은 또 다른 측이 등장했다. '지적하는 측' 그래서 누군가 그랬다. "어떠대고 지적질이냐고" 그 법률가는 속으로 그랬을 것 같다. 동어반복. 현대캐피탈이 내던 퀴즈는 총자본의 일반적 담화방식을 대표한다. 총지배가 하는 담화와 또한 닮았다. 그런 퀴즈를 낼 때 어떤 양식으로 대응할까? 확실한 것은 개인의 태도다. 아니 개민가?

그걸 풀고 앉았다. '~고 앉았다'는 순우리말이다. 꽤 한심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놀라운 점은 다 그러고 있다는 점이다. '다 ~다'는 순우리말이다. 놀라운 경탄을 나타낸다. 솔직히 개미의 태도와 지능이 문제인지 또다른 점이 문제인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굴하고 관철되는 현상들엔 어떻게 이해할지 모르겠다. 놀랍게 답답하다.

분명 그런 의도를 알기는 어렵다. 그래서 누군가는 지적을 하지.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은 이미지에서 직관적으로 해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자신에게 위해가 되는 것. 특히 장기적이며 큰 타격이 되는 것에 대해선 남자건 여자건 어른이건 아이건 분명히 눈치를 챈다. 이상하다는 것을 분명 '눈치'챈다. 내가 보았거나 J가 또다른 데서 보았던 것은 일단 그러한 단초들인 것 같다.

신호등이 있다. 빨간불이 켜지면 정지하고 파란불이 켜지면 간다. 그건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아주 오래 뇌에 '저장'되고 굳은 살이 박힌 룰이다. 이렇게 각인된 '체계'는 어지간하면 무너지지 않는다. 난 아직 한번도 빨간불이 가서 아주 가거나 파란불에 정지해서 못갔다는 얘기를 들은 바가 없다. 집단적으로 관철되고 가장 낮은 단위, 그게 개인이라면 개인의 수준에서도 관철되는 룰이다. '安全'의 룰이다. 모두를 위해 개발됐고 모두를 보호하는 룰이다.

make break make는 그간 아주 다양하게 진화했고 시중에 화제가 됐다.그 세련됨. 강한 메세지성, 화려한 이마쥬. 그 속에 들어있는 이데올기적 부정성과 구조적 '착취성'은 이해되지 못한 것 같다. 인간이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은 다양하게 해체된다는 가정이 옳은 것 같다. 어제 오늘 맴도는 J이야기를 오늘 케이블을 보면서 그렇게 확인했다. 그리고 다른 것에서 비슷한 확인을 했다.

인간은 결국 '자기'라는 벽에 사로잡힌다. 자기의 벽에 갇혀서 자기를 믿고 자기의 생각대로 말하고 쓰고 실행한다. 그럼엗 대부분은 대부분의 경우에 불만도 어려움도 없다. 아주 결정적일 때 혹시 어떤 남자 처럼 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불행함. 그런 것들에서 '개인'이라는게 읽히고 그 근간으로서 '자유주의'가 읽힌다.

흔들리는 버스에서 아이폰을 하는 젊은이. 어두운 방에서 웅크리고 케이블 보는 외로운 아이. 마트에서 웃으며 카드를 만드는 새댁과 신랑. 빌딩 앞에서 일인시위를 하는 운동가. 골리앗에서 고공시위를 하는 노동자. 밤기차를 홀로 모는 일인차장. 자신의 파티션에서 일을 하는 직장인. 길가 행상에서 조는 아줌마..모두 우리시대의 익숙한 풍경이다. 거기에 개인이 있다. 우리시대 개인의 초상과 자유주의. 그리고 현대캐피탈은 항상 함께 있다. make break ma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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