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도전과 '진보의재구성' --방통컨버젼스와광고


무한도전을 이해할 때 MBc는 함께 생각된다. MBc를 생각할 때 '진보/보수'라는 레이블이 함께 붙어있음을 발견한다. 무한도전은 의외로 장수프로그램이다. 2006년 5월 6일 '국내 최초 리얼 버라이어티 쇼'를 표방하며 시작했고 최근 시청률 15%수준이다. 1박2일 시청률 보다는 낮으며 이런 현상은 mbc뉴스 시청률이 kbs뉴스 시청률 보다 낮다는 통념적 인식과 함께 궤를 이룬다.

무한도전을 줄여서 '무도'라 부르고, 때론 그들이 하는 것을 '무모한도전'이라 부리기도 한다. '무도'가 됐건 '무모한도전'이 됐건 사실 그자체는 변함이 없다. 무한도전은 기울고 있다. 언젠가 찍었던 정점에서 무한도전은 보여줄게 정지됐던 것 같다. 연속 재상영되는 영화는 혁신적일 필요는 없다. 꾸준히 갱신한다는 것은 피말리는 일이다.

포맷이나 틀의 핵심이 '혁신성'과 '갱신가능성'에 놓여 있다면 스스로 놓은 덫은 아닐까? 누군가 만든 음모라고 했다면 그건 아마 '자본주의' 자체일지 모른다. 또는 mbc라는 매커니즘의 고질병일지 모르겠다. 계속 구성해내면서 스스로의 자리를 만들거나 입지를 넓히는 노력! 가상타고 볼지도 모르지만 소진된다고 볼 수는 없을까?

무한도전의 구성은 단타성이 특징이다. 불연속되고 '한건'을 건지려는 노력은 신문기자의 특종잡기 노력에 비유될만 하다. 언제부턴가 우리 연예오락프로 또는 방송의 특징이 되버린 이런 노력. 시청률이 방송판의 전광판이 된 후 현상같다. 무한도전을 보면 그런 점이 역력하다. '스타'프로그램을 갈구하는 노력은 누구에게나 일반적일까?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진보의 재구성. 쫌 무모한 노력같다. 그렇지만 새롭게 더욱 새롭게 만들어가는게 항상 요구되는 듯 하다. 새로워지고 만들어나가며 주목받을 것. 시대의 또다른 주문이다. 좀비라고 한다. 암시에 걸려 현대사회를 걷는 시민들을 좀비라고 한다. 무한도전의 창에 등장하는 시민들은 꼭 좀비같다.

좀비와 주인공의 관계는 대개 비극적이다. 좀비를 무찔러야 주인공은 생존할 수 있다. 무한도전은 물론 시민도 시청자도 무찌를 필요가 없다. 되려 시민과 시청자의 적극적 지지와 사랑을 얻어야 한다. 그럼에도 무한도전 창에 걸리는 시민들은 좀비 처럼 느껴진다. 시무룩한 시민들. 활기없는 거리, 도시. 그렇게 구성되는게 무한도전의 렌즈다.

좀비영화에서 주인공들은 늘 폐쇄공간으로 후퇴했다. 무한도전의 후퇴는 좀비떼와의 스킨십을 피하는 노력의 일환일까? 폐쇄공간에서 감시카메라에 기록되며 그들은 '유희'를 즐긴다. 그들만의 사랑과 그들만의 증오, 분노를. 기록은 항상 중요했다. 역사를 바라보기 때문은 아니지만 생존에는 필요하므로. 그렇게 기록됐고 그렇게 상영된다.

해묶은 주제는 대부분 '대중문화와의 관계'를 다룬다. 감시카메라와 리얼리티쇼가 도입된 후 그러한 관계성이 전도된 느낌이다. TV를 보며 마치 그들을 감시하고 지배하는 것 같다. 내가 보는 일상과 생활이 허구며 허상임에도 불구하고. 며칠인지 알 수 없는 공간과 시간에 기록된 것을 짧게 축약시켜 본다는 자체는 이미 허구며 反리얼리티다.

진보의 재구성. 공통의 과제일까? 누군가의 숙제일까? 과제/숙제의 주인은 과감하게 그들에게 준다. 왜냐면 그들이 주인공이니까. 시묵룩한 좀비로서 토요일에 가끔 그들의 '유희'를 보면 족하다. 솔직히 재미는 없다. 너무 축약시켜 이해하기 어렵기조차하다. 그럼에도 묵묵히 그러나 가끔 보련다. 상영되고 있고 선택지는 별로 없고 공짜라서 ^^

MBc가 맡고 있는 역할이라는게 무한도전이 맡고 있는 것까지 규정해내는 것 같다. 다분히 이중적이며 표변적인 그들의 세상살이. 그런건 정말 팍팍 넘어온다. 전직 CEO의 행태부터 예술의 경지에 이른 '무도'까지. 수미일관하게 전개된 사건들과 일들. 하다못해 무한도전에 걸리는 세상까지. 대중문화와의 관계 또는 대중문화내부의 관계를 '모순덩이'로 이해시키는 케이스스터디같다.

자 이젠 내부다! 요즘 연예오락은 PD를 스타로 부각시키는 마당같다. MBc가 전직기자와 전직사장을 스타'정치인'으로 부각시킨 마당이라면. 이러한 행태에 대해서 뭐라 비판할 생각은 없다. 그것또한 관행이라면 관행이고 절차라면 절차니까. 다만 한가지 '업종코드'는 괜히 있는게 아니라는 점만 상기한다.

스타성 강한 PD가 전면으로 떠오르는 것은 또하나의 주세같다. 이런 현상은 이미 예견됐다. 구성원들이 스스로를 부각시키면서 스스로 입지해나갈 때 이미 예정됐다. 그건 어느덧 사회저변의 추세다. 누구나 나(me)를 주목하고 나(I)는 중요하며 나의(my) 관계를 다지고 나의것(mine)은 지상명령이다. 대세라면 대세다. 이런 것을 무한도전이 주도했다는 뜻은 아니니 곡해마시길.

그러한 흐름에서 이탈하지 않는게 '무도'의 위력이다. 굉장한 장악력과 흡수력, 집착력을 보이는 특징. 이 모든 것은 역대 PD와 구성원의 공이리라. '하하'군대가면서 변동이 있었고 그외는 '길건' 투입된 것 말고는 큰 변화가 없다. 포맷도 넓게보면 '리얼리티쇼' 포맷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았다. '관계'를 다루는 포맷상의 특징 또한 그대로다.

'관계'조차 상품화된 것은 오래전 일이다. 누가 최초랄 것도 없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관계'에 주목했고 '관계'는 TV프로그램의 메타컨셉이 돼버렸다. 방송을 보며 '관계'를 읽어들이는 것은 이젠 중요한 일상의 즐거움으로 자리잡았다. 다양한 관계들을 '무도'를 보며 파악한다. 일시적이거나 오래된 그들간의 인간관계. 주고받는 말과 행동도 관계를 위한 단서다.

루카치는 '허위의식(虛僞意識 Falsches Bewubtsein)을 말했다. 지배계급의 이해(利害) 관계에 의해 사상이 현실을 올바르게 반영하지 않고 그 모습을 왜곡하는 것이나 보수적인 계급 의식이 현실의 모순을 덮어 버리고 은폐하는 경향을 말한다. 허위의식은 반드시 의도적인 것만은 아니고 '우연히' 허위의식 또는 이데올로기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관계'를 생각할 때 이런 점은 분명해진다. 현실세계 관계의 불명확성은 매체(media) 관계의 불명확성으로 증강된다. 서로 증강시키며 상승시킨다. 모순적 관계가 상호침투하며 상승의 변증법을 형성한다. 그러한 맥락에 진보의 재구성이 있으며 그 한 팔을 '무도'에 내줘버렸다. 수많은 시민들이 무한도전의 창에 역투사되나 믿고저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곳에 '대중문화와의 관계' 또한 있다. 오래전부터 지적되듯이 매체의 모든 것은 시공간의 축약과 편집기술을 바탕으로 한다. 미래에는 3d와 증강현실로 매체는 무장될 것이며 건전한 시민과 의식은 박탈될지 모른다. 전도됐다는 느낌은 反리얼리티를 바탕으로 서로를 모두 속인다. 누구도 사실은 감시하거나 지배못하는 관계로 서로소외된다.

이러한 사회 진보의 재구성은 함께 무한도전을 배제않고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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