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엔드>, 아파트엔 억울하게 죽은 '구신'이 산다 영화소개와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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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은 마치 원공간 같았다. 스토리가 태어나는. 아파트엔 억울하게 죽은 '구신'이 살게 됐다. 아파트 배란다 밖으로 아래서 위로 떠오르는 '근조'라 쓰인 노란등을 기억하는지. 이미 죽은 보라(전도연)는 서민기(최민식)의 기억과 꿈에서 노란등이 돼 떠오르는지? 묘한건 그 장면에서 노란등을 보고있는건 되려 보라라는 점이다. 묘한 그 장면에 서민기는 없다. 서민기는 그 장면에서 배제돼 있었다. 영화에서 드문 '여성'의 풍경이다. 누군가의 응시로 의미상 구성되나 영상상 구성되지 않은 장면이다.

노란등은 그후로도 오랫동안 떠올랐다. 뭘 의미하는걸까? 그저 자유스럽운걸로 공중에 떠다니고자 하는 귀신의 소원이리라 생각했다. 자신의 근조를 보는 보라는 전혀 슬프지 않았다. 담배조차 한대 태우고 있는 것 같았다. 귀신은 슬퍼하지 않았고 서민기는 머리에 고민을 그덕 뒤쓰고 잠을 깬다. 옆엔 둘 사이 벌어진 살인사건의 원죄라 할 아이가 졸고있다. 아마 평생 서민기는 꿈을 꿀 것 같다. 귀신과만 함께 할 꿈을 평생 꿔야할 것 같다. 이런게 죄의식이다. 죄의식이 공포와 폭력이 돼 덤비는게 미국영화의 전통이라면.

한국영화에선, <해피엔드>의 죄의식은 천천히 스며드는 죄의식 같다. 6,70년대 영화의 꿈은 서구적 인식의 주입이 일관되지 않았을까? <월하의공동묘지>같은 영화에서 원한품은 미인은 마치 미국영화의 악령같다. 고전주의 공포영화로부터 반복되던 반복이 되풀이돼 풀려나는 얘기였다. 그랬다면 99년 비로서 꾼 영화의 꿈에선 선량한 한국 중산층의 인식으로 나타난다. 죄에 눌려있되 천천히 스며드는 그것은 '해피엔드'다. 관객에게 돌려진 스크린의 풍경으로 '죄의식'은 견딜만한 것 이었다. 다만 골치가 지끈거릴뿐.

2010년 영화 원공간이 불필요한 경지에 도달했다. 누구도 사실관계가 필요없게 됐다. <해피엔드>의 '예지몽'은 꽤 적확한 사실관계와 인과관계, 더나가 살인/처벌의 필연성을 쌓아 놓았다. 영화를 본 98%는 살인과 처단에 동의할 것 같다. 설혹 시커먼 남성 관객이 아닌 여성 관객이라해도 보라에 대한 처벌에 동의를 얻어내리라보았고 그건 98%에 이르리라 생각했다. 높은 동의수준에 이를 그것들이 정당화해낸 세상은 사회로 생활로 법정을 이끌어온 것 일까? 실제론 다른곳에 도사리고 있는 법정을.

현실세계의 영화와 영화장치는 교묘한 타협과 협상을 했다. 그건 관객에게한 양보며 영화 스토리텔링의 확장이다. 영화가 영화로서 남으려면 여러 동의를 해야한다. <해피엔드>는 완성되며 현실의 외부로 난 출구에서 자율적으로 숨쉬게 됐다. 반면 세공되고 연마된 보물뒤엔 장인과 전문가의 고도의 절개술과 봉합술이 함께 되집어간 길이 촘촘히 놓여있었다. 영화의 뒤를 본다면 수많은 실패하거나 성공한 수술의 집도실이 있었다. 놓여있는 살풍경은 영화를 도달하는 세상에서 뒤로 되당기리라.

진은 말한다. 사진의 증거력은 무얼 말할지 알 수 없다는데 가공할 괴력이 있다. 서민기는 처음엔 심증만 가지고 움직이는 형사같았다. 어느순간 사진을 얻게된다. 사진에서 보라는 여성의 성적 환희를 연상시키는 들뜬 분위기를 연출시킨다. 어떤 여성은 메두샤 신화에서 원래 아테나 신전의 가장 아름다운 시녀였고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폭행했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아테나는 그녀을 추하디 추한 사악한 메두샤로 거듭나게 하며 외진 오지로 추방했고 고립시켰다.

보라가 서민기에게 당한 폭력의 구조는 유사한 동의와 합의에 기반했다. 영화 스크린에서 재연될 영상이 반사회적이거나 아님 사회의 보수적 가치를 정면으로 옹호하거나 어느쪽이건 관객에게 보여지려면 동의와 합의, 묵시적인 언약이 있어야 했다. 영화장치라 불린다. <해피엔드>는 99년이라는 정말 묘한 정황에서 독특한 펀딩으로 제작됐다. 해피엔드 영화펀드를 만들고 여러 주주의 자금지원은 암흑같은 영화제작의 어둠을 닦어낸 창이였다. 해피스타트.

흥행은 성공했고 사회에 던지는 신호는 '해피엔드'였다. 행복한 결말. 열린 영화텍스트는 불행히도 당대의 도전과 실패를 감히 수용했다. 여전히 성취된 인과주의 지식인주의 이성주의는 열린 텍스트에 마블링 처럼 박힌 쇠봉이었다. 영화는 검열되지 않았고 금지되지 않았으며 자율적으로 제작돼도 당대에 조응할 뿐이었다. 영화가 시간이 흘러 되읽히고 새롭게 현실에 접착될까는 여전히 과제로서 제공되는 것이다. 어떤 새로 세상을 읽을 신호등으로 반영됐던 세상을 되반영할 살아있는 생물로서 영화가 등장했다면.
 
아파트 안테나로 케이블로 영화의 신호와 파장이 흘러들어간다. 영화는 중산층의 해피엔드를 책임지지 않는다. 약속하지 않은 언약의 증표를 요구했다면 전근대적인 논법이리라. 책임지지 못할 공감은 저주스러운 곤경이 될지 모르리라. 그 아파트엔 억울하게 죽은 '구신'이 산다. 만약 전작을 뒤집는 <해피엔드>의 후작이 몽상된다면 보라도 서민기도 달리 배정돼야 했다. 감히 도장찍고 싸인한 계약서의 증인은 누구인가 진정 찾아내야 한다. 진창에서. 그해 99년 원공간에서 함께 약속했을 때.

그게 바로 공동체의 외부였다면 잘못끌어드린 셈이다. 지금 또다시 아파트의 안테나와 케이블로 무엇이 타고들어온데도 거절할 명분과 이유는 없다. 이미 약속했으며 그건 중산층의 생존을 위한 희생제의의 다름아니므로. 불행히도 보라는 화내지 않는다. 딱히 진술할 수 없는 설정이다. 외부의 보이지 않은 손이 스며든것은 배우자 서민기의 작용으로 치환됐을뿐. 공동체인 가정과 국가. 그리고 또다른 공동체들. 애초에 공동체의 근거는 죄의식의 공유가 아니였다면 '희생'의 공유다. 모두 한 입씩 배어먹은 예수의 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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