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자 톱아보기...수다와 개그의 일치점 --피메일페르소나

사람은 셋트(set)로 생각된다. 구조주의 언명과 다른지 같은지 모르나 하나를 떠올리면 집단과의 거리가 구별된다. 그래서 셋트다. 개체로 존재하지 않고 함께 존재하는 사람들. 그리고 한 명. 개인. 한국사회 개인은 중상층 가부장/과부장 남성이고 그렇게 발견하지 않는다면 다른 개인을 목격할 수 있다. 아줌마 나이에 아줌아가 아닌 여성을 복원할 수 있는 이유다. 그래서 이영자다. 

일가견(一家見)있는 사람들이 있다. 요리면 요리. 운동이면 운동. 노래면 노래. 수다에 일가견있는 사람도 있다. 우리동네 아줌마들. 그리고 뜻밖의 인물들이 여대생들이다. 스타벅스를 즐기고, 정숙하고 고상하며 품위있는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하여튼 수다스럽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근데 의외 꽤 수다스럽다. 이지적이며 개인적인 삶의 기대치를 엎고 수다스러운 사람이 있다.

그리고 또 한 인물. 이영자. 의외 예대의 교수를 겸임하고 있다. 정숙하고 고상하며 품위있는 것과는 역시 거리가 멀지만 꽤 수다엔일가견이 있었다. 이지적이며 개인적인 삶의 기대치를 엎고 수다스러운 사람이 있었으며 그러한 타입의 또다른 모습같다. 떠오르는타입들이 대체로 고정관념에 충실했다면 예외적 타입 또한 있다. 그래서 이영자다. 

페미니스트그룹이라는 네이밍이 적절한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이밍(naming)한다면 그러한 이미지의 인물들이 꽤 있다. 글고 연예판에 그러한 이미지의 인물들을 그루핑(grouping)한다면 대표적인 그룹이 '최진실사단'이였다. 맹주였던 최진실씨는 죽었고, 동생 최진영, 안재환도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굉장히 비극적이며 안타까운 사건들이다.

남은 사람들 중 '엄정화 이소라 이영자 홍진경 정선희 최화정 변정수 김희선'는 아직도 포털검색을 하면 '최진실사단'으로 불리고 있다. 심히 부적절하다. 포털의 기록과 사진, 동영상이 반영구적으로 남고 조회되고 분류되어 '인간에대한평판'을 확대재생산하는 것은 전혀 해묵지않은 문제다. 인간에의 평판과 자유로운 삶의 존재성에 대한 문제.

드디어 이.영.자.다. 정말 쓸말없는 사람. 임펙트는 있돼 쓸말 정말 없는 사람. 연기를 했다면 분명 배역은 할당된다. 선인(善人)과 악인(惡人). 미인(美人)과 추인(醜人). 긍정(肯定)과 부정(否定). 웃기는 사람과 우스운 사람. 한국말은 마지막이 중요하댔다. 웃길까? 우스울까? 묘한 차이를 결정하는 뉘앙스는 우리의 가치체계와 관련이 약간 있다.

개그맨을 어떻게 파악할까? 또는 수다를 어떻게 읽을까?와 똑같은 수준의 언설이다. 말하자면 가치관이며 그것은 일종의(a kind of) 가치체계다. 마치 내 언설이 이해되는 정도에 고민이 없는 것 처럼. 어떤 자유로움이 대기중에 충만하다면 좋겠다. 자유로움(pleasure)은 자유(freedom)와 엄연히 다르다. 그러한 이해가 없다면 참이해는 어려울 듯. 우리는 모두 꽤 다르다.

90년대 캠퍼스에서 이영자를 언듯 봤다. 90년대는 겨우 최류가스와 각목질이 소강되기 시작한 무렵이다. 대학생이 도서관에 묻히는 게 암묵적 허용의 벽을 넘어설 때다. 방송국 차량과 경찰관이 눈총을 받지 않고 캠퍼스로 들어가는게 묵인되기 시작했다. 폐쇄적인 대학이 또다른 세상을 향해 질주한 시대다. 질주.

기억에 외계인 처럼 이영자를 봤던 것 같다. 산더미 같은 방송인들이 뭘 찍으려고 도서관과 캠퍼스를 다녔고 페쇄적인 대학생은 이런 모습이 꽤 생경했다. 지금이라면 폐쇄적인 대학생이 더 생경할 것 같다. 그만큼 캠퍼스와 대학생은 대중문화, 연예인에 익숙해졌다. 이렇게 볼 때 기실 더욱 이해되지 않는 면이 꽤 많다. 어떤 관계들. 연예인과 팬, 이영자와 대학생, 김연아과 국민사이의 그것.

외계인의 눈에 지구는 다만 푸른별이 아닌 퀘스쳔마크의 묶음이듯 이러한 관계는 꽤  많은 사람에게 아이러니였다. 연일 스포츠신문, 포털 심지어 트위터에 작렬하는 사건들 사건들. 특히 대중연예인과 함께 일어난 일들. 관계를 갑(甲)과 을(乙)의 것이라 할 때 예전엔 갑(甲)측이 이상했다. 기억에 강했던 사건은 94년도에 처음 각인됐다. 유명한 배병수사건이다.

연합뉴스 기사엔 "1994년 전 매니저였던 배병수씨가 최씨의 운전기사 겸 로드매니저였던 전모씨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져 최씨가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하기도 했다. 전씨와 공범 김모씨는 강도살인 혐의로 무기징역을.."라고 돼있고, 블로그엔 "배병수가 로드매니저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최씨는 증인으로 법정에 서면서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소문에 시달렸고.."라고도 돼있다.

사건을 재론하는 것은 그때 아주 충격적이였고 연예계에 대한 순수한 비판적 인상을 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푸른별 지구에서 난 물론 을(乙)이다. 이영자를 톱아보는 이유는 이영자가 누리는 입장이 순수하게 갑이 아니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을은 더더욱 아니다. 이영자는 지상파에 고정프로가 없는 것 같다. 교육자지만 통념이나 이미지와는 배치되는 느낌이고.

케이블에서 꽤 유명한 <현장토크쇼택시>를 진행하지만 케이블의 속성상 무한반복성과 탈시간성은 문제다. 이영자는 90년대중반이후 최고수준이였다. 수다와 개그를 그대로 엮었던 것은 독특하며 해소하는 카타르시스를 주기도 했다. 듣기 싫지만 듣고 있으면 흡인되는 여자들의 수다가 꽤 유효한 컴셉이였다. 많은 부침속에 많은 연예인이 잊혀졌고 사라졌다.

'최진실사단' 또는 '배병수사단'은 몰락했다. 세(勢)를 이뤘던 사람들이 차곳차곡 뒷전으로 밀린 것 이다. 그럼에도 수다와 개그는 일치하는 데가 있다. 삶과 생활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일치감이 중요했으나 가치 또한 포스트모던한 방송환경에서 뒷전으로 밀렸다. 반면 일련의 사건들은 과거의 인물들을 다양한 경로로 소환시키는 조짐이다. 수다 또한 개그무대에 재소환된게 아닐까?
 
해소와 카타르시스로서 자아도취의 황홀경을 일으켰던 '수다'가 재소환된 개그프로들. 현재 방송구도는 수다가 공정하게 배분되기에는 틀이 너무 좁다. 경쟁프리젠테이션을 통해 소수에게만 수다가 배정되고 그것조차 지나치게 축약된 나머지 '암호화'되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모두 웃는 것은 더욱 아이러니다. 이해를 바탕으로 한 개그는 개그 커뮤니케이션이 '수다'일 때 구조적으로 어렵다.

외려 수다떠는 개그맨의 해소감과 '열정'만이 피부를 타고 넘어오는 것이다. 세삼 이영자를 소환하는 것은 이영자 개그는 '소통(커뮤니케이션)'을 바탕으로 했었다는 점이다. '이해할 수 있는 수다'와 '수다를 떠는 즐거운 자유로움'이 함께 넘어왔다. 방송판 주위의 일련의 변화를 보면서 이미 시작된  변화가 어떻게 갈까 생각해 봤고, 이영자와 이영자를 둘러싼 일들을 세삼 톱아봤다. 

공간과 장이 시간과 결속되면 효과를 발휘한다. 무언가 호출할 명령이 발효하는거 같다. 내가 주목한게 내 주목이 아닌거로 이해할 수 있을까? 빈통, 인간이 개인으로 결합되고 영토화하는 비운을 맛보는 짜릿함. 그게 글을 마치는 소감이다. 워낙 많은게 호출되는 총체적 시대. 나도 맞돌하나 놓아본다. 김태호, 김황식. 중상층의 스타로서 정치가가 쓰레기더미를 뒤집어쓰며 내리거나 오르는 시대, 아줌마 아닌채 사십맞은 여성 한분을 맞돌로 놓았다. 이건 내 어떤 기획의 한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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