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의 믿음과 실망, '문화'의 단편들 --젊음과컬쳐


** 90년대는 개인적으로 각별했던 시대다. 그래서 이런게 남아있었나 보다. 연말을 앞두고 임시저장해놓은걸 거의 다 지웠다. 한 50개나 지웠다. 꽤 망설였고 주저했던 글감들을 반쯤 써놓았거나 완성해놓았다가 차츰차츰 지워버렸다. 객관적 이유는 페이스북이다. 나름 글쓰기에 대한 욕동을 해소해준 좀더 편한 플랫폼의 등장이다. 주관적 이유는 글쓰기가 해소할 것의 부재다. 앞으론 부재 뒤에 남는걸 주목하려 한다.

포스
팅도 일이라면 최근 일과 노동의 가치에 대해서 깨달았다. 보상되는게 적은 포스팅 블로깅 트위팅에서 쫌만이라도 채워가야 한다는게 첫째고 '생산'을 합리화 유연화 효율화해야 한다는게 둘째다. 신자유주의가 패퇴하는 시절 아직도 신자유주의가 남긴 자욱은 여전히 이 곳의 여러군데에 남겨있다. 그래서 짧은 두 주제를 더하기(+)를 이용해 하나로 묶었다.

국회 청문회에서 신재민이 어떤 물음에 답하며 되물었다. "이 자세가 불편하십니까?" 신재민은 유인촌의 뒤를 이어 문화정책을 손볼뻔한 인물이다. 이자세는 물론 불편했고 그러한 정책은 해가 됐을 것 같다. 90년대였다면 시대를 또다른 어둠으로 몰아넣을 괴력을 발휘했을지 모른다. 90년대에 어울릴 인물들이 너무 늦게 너무 많이 등장한다는게 흠이다.
 
90년대 문화수장은 서태지 외에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의 그러한 노력이 문화의 불을 지피거나 문화를 소각하려 했을 것 같다. 그러한 노력들 사이 90년대 감수성은 가히 '석방'투쟁을 전개했다. 인간과 청년/녀의 감수성엔 불이 지펴졌고 풀무질을 해댔다. 이후 사반세기를 갈 노력들이 이때 본격화된 것 같다. 90년대는 감수성 해방의 원년이다.  

90년대 가히 인간 감수성의 해방노력에서 주체적 동력은 젊은세대였고 현장은 대중문화였다. 가장 손쉬운 대상은 대중가요였다. 가요는 새로운 전성시대를 연듯한 느낌이였다. 김광석은 민중가요와 대중성을 넘나들며 노래에 따스하나 정신적인 기운을 불어 넣었다. 가로되 진흙에 기운을 넣은 새로운 구세주의 출현이였다. 

김광석의 노래가 건넌 다리는 민중에서 시민으로 이어질 '오작교'였다. 높은 수준을 보였으나 학원밖의 사회와 고립됐던 노래진영을 다리 너머까지 이어준 첫 신호탄였다. 여러 노력은 이전부터 꾸준했으나 불발로 불만 붙은채 꺼져버렸다면 김광석은 성공적이였다. 다들 "사랑했지만"을 기억한다. 아름답고 의식적인 노래.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이라는 구절은 버림받은 사람과 혁명에 대한 애타는 안타까움이였다. 90년대 감수성의 또다른 면은 망각의 강 건너기와 잇다은 부분이 있다. 해방되대 잊어버리기, 어떤 핵심적인 사유의 등장같았다. 문화의 서구화가 비약적으로 진행된 세태였으며 애국주의의 강을 건너 깊게 침투했고 또한 많은 망각들을 스스로 요구했다.

우리 노래에 대한 강한 애착이 퍼진 것은 그것의 또다른 양상이였다. 그런가하면 서정과 연민을 다룬 가요가 있었고  신승훈 1집 <미소속에비친그대>, 2집<보이지않는사랑>은  그것들이였다. "Ich liebe dich so wie du mich am Abend und am Morgen"로 시작하는 신승훈의 노래는 제2외국어를 배운 세대들의 지식수준과 다았으며 참사랑을 찾고있엇다.

'사랑'이라는게 주제가 되었다. 트로트의 통속성 때메 비난의 대상으로 수세에 처했던 사랑이 '사람들'과 함께 다시 왔다. 김광석과 신승훈의 노래는 90년대초엽 함께 히트했고 정형화되나마 사랑을 복구시켰다. 사람이 하는 것 아름다운 사랑은 심한 고통에 처한다는 필연을 경험적으로 인식시켰고 그렇게 함께 노래를 불렀다. 90년대 사랑 감수성.

사랑은 전적으로 성과는 아니였다. 성과였으며 또다른 해체와 헤제를 위한 준비였다. 인감 감수성에 취하며 열린 빗장으로 들어온 것은 아주 많았다. 말하자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이다. 열린 상자의 마지막에 과연 '희망'이 있었는가는 모르겠지만 정말 많은 것이 함게 나욌다. 그중 하나는 '차가운 인식'들이였다. 대중음악에 대해 본격적으로 알기.

그전 가요에서 꾸준히 지적된 '무의식성/몰개념성', 대중가요의 진정한 특징이 전복적으로 와해되는 과정이 있었다. 특수한 몇몇 가수의 몇몇 노래를 제외하고 가요는 대중의 우민화 무감동화를 위한 도구로 적절하게 쓰여왔다. 감정없고 성마른 사람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이러한 특색은 그전 가요에서 그러한 사람들과 적절하게 조응했다. 대표적 쟝르는 '도로토'

'도로토'는 원래 우리 대중가요의 주인격이다. 서민 정신에 제일 큰 지분을 가지고 있으며 구세대 문화의 총아다. 역겹거나 유치하지만 압도적인 지지를 가진 우리의 문화자산. 거부할 어떤 것. 대중을 우민화하며 감정선을 둔마시키는 기제. 이런 인식은 꽤 뿌리깊다. 그에 대한 반동으로서 '민중가요'는 또다른 반동을 가져왔다.

이승환이 등장한 때는 90년대다. 1989년 <텅빈 마음〉으로 데뷔하였으나 <기다린 날도 지워진 날도〉<너를 향한 마음〉<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내게〉〈덩크슛〉〈천일동안〉<가족〉〈당부〉등의 노래로 한 세대의 가슴을 흔들었고 9장의 정규 앨범과 비정규 앨범을 합하여 총 1000만 장이 넘는 앨범 판매량을 기록했다. 감수성을 음악공학화 한 대표적 가수다.

마케팅이 언제쯤 대중가요와 본격적으로 결합했는가는 숙제다. 화학적 결합으로 완성된 형태를 보여준 것은 이승환이 아닐까? 팬덤또한 이승환이 완결시켜갔다. '오빠부대'와는 다른 형태의 팬덤. 감성을 제대로 읽고 표현한 노래들이 홍수처럼 밀려왔고 몇몇은 신기원을 열었다. 가수의 외모와 퍼스날이 본격적인 상품가치로 인식되기도 했다.
  
015b는 굉장한 진폭을 보여줬다. 운동의 헤게모니가 투철했던 90년대 공간에서 좌와 우로 푸코의 진자 처럼 아름다운 운동을 했던 팀이다. 청년/녀의 순수감성부터 사회비판적 주제까기 꽤 폭이 넓었다. 주목했던 사람은 객원가수 '윤종신'이다. 왜 정규멤버가 아녔는가는 모르겠으나 정말 빛나는 객원이였고 <텅빈거리에서> <친구와연인>에서 설득력 강한 보컬을 들려줬다. 

015b에 오면 대중가요에 '브랜딩'이라는 게 도입된게 분명했다. 노래도 노래려니와 가수/팀의 이름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외 팀의 구성형태는 '조직론'의 대상으로 이해됐다. 객원가수 비정규가수와 같은게 등장했다. 대중가요가 노래의 주제와 의미를 잡아가는 것은 보수적 틀을 존중하는 선에서 거의 완벽하게 자유화됐다.

대표적 80년대 가수 이선희는 90년대에 6집부터 11집까지 6장의 앨범을 냈다. 특이한 경력은 91년부터 95년까지 지방자치제 서울시의원을 지냈다는 점이다. 90년 6집 <왜나만>에 수록된 <추억의책장을넘기면>은 64년 충남 보령생 27세 이선희가 여전히 건재함을 확인했다. 정치적 활동과 다소 매너리즘에 빠진 팬덤 탓에 90년대는 80년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였다. 

대중음악인이 정치를 할까? 했다면 어떤 정치를 했을까? 이선희는 90년대에 정말 정치를 했다. 자민련후보로 나와서 서울시의원을 했고 마포구에서 단선됐다. 이선희와 자민련의 끈끈한 관계는 그녀의 결혼식 주례를 김종필씨가 하는 것으로 절정을 이뤘다. 발라드음악이 보수적인 정서를 표현한 수단이라는 견해가 실증적으로 설득력을 얻은 것 같다.

97년엔 젝스키스가 1집을 냈고 2005년 5월 공식해체하기까지 활동했다. 멤버전원이 꾸준히 팬덤을 누린 H.O.T와는 달리 은지원만이 홀로 지금껏 종합연예인으로 활동한다. <커플> <폼생폼사>는 대표곡으로 남아있다. H.O.T의 곡들이 강한 상업성과 스타마케팅, 광적 팬덤현상에 의존했다면 젝스키스는 상대적으로 성숙된 팬층을 형성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젝스키스는 영어작명이 아닌 독어작명이다. 그래서 쫌 특이했고 데뷔초부터 관심을 끌었다. 댄스음악을 했고 "댄스음악은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다"라는 몰이해를 퍼뜨린 여러 아이돌 그룹의 효시격이다. 남성 아이돌 그룹 현상은 신드롬이였다. 정말 광적이며 자신의 선택에 결사적인 지지를 하는 팬덤을 나았다. 비이성적인 증후가 급속하게 퍼졌다.

시간을 거꾸로 되감는다면 이러한 팬덤은 80년대 한 시집에 꽂쳤다. 90년대 감수성이 대중음악 대중문화로 몰두했다면 80년대엔 아직 문학이였고 '감수성'은 기성문학을 거절 사절했다. 그게 감수성이며 청년/녀였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 믿는 것에 몰두하는 세대의 본격적 스타트는 80년대 386?을 효시로 잡을만했고 대표적 인문사건이 <노동의새벽>의 출현이다. 당돌했다.

<노동의새벽>은 84년 9월 25일 도서출판 풀빛에서 펴낸 시인 박노해의 첫 시집이며 80년대 노동문학을 대표한다. 현장노동자로 일하던 중 펴낸 <노동의 새벽>은 충격적 감동을 줬고 군사정부의 금서조치에도 약 100만 부가 팔렸으며 40여 년간 무권리 상태로 침묵하던 천만 노동자를 각성시켰다. 문화가 대중과 역사에 갖는 포스가 뭔가를 보여줬다.

이젠 연예인과 스타노릇도 '노동'에 비견되는 시대다. 막대한 대박의 가능성은 강도높은 연예/감성노동과 상쇄되기조차 한다. 90년대 감수성 해방의 도래는 84년 <노동의 새벽>의 팬덤(?)과 인과관계성을 생각했다. 젊은 감수성들이 80년대 노동시집을 택했다면 또다른 감수성들은 90년대 전혀 다른 얼굴의 '노래'와 '가수'를 택하진 않았을까?

<노동의새벽>은 '노동해방문학'이라는 문학운동과 결부시킬 수 있다. 기실은 독립된 팩트(fact)로 분리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연계된 것으로 믿어진다. 그 믿음을 존중한다. 박노해라는 필명은 '노동해방'의 축어라고 믿어졌고 '시(詩)'가 가지는 전위성 혁신성과는 별개로 '흥행'된 브랜드마케팅의 수단쯤으로 치부됐다. 노동과 해방을 말했으나 작아지는 그림자들.

80년대는 90년대도 그렇지만 전일적 공간이라고 말할순 없다. '운동'은 대학과 청년/녀의 사령탑이자 '수령'이었으나 그렇다고 '운동'의 전일적 전제는 아니였다. 다수는 운동과 시대를 함께 존중했다. '내'가 소속된 세상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는 진정한 물음이었다. 진지하며 성찰하는 '인간'이 도래할 징조였을까? 아님 역사와 사회로 퇴각하며 후퇴할 신호(sign)였을까?

<노동의새벽>이 읽히는 것은 두가지 사고를 함께 읽어주는 것이다. 운동이 '학운'에서 '노운'으로 진화하는 깃발이며 어쩜 음모일수도 있다. 행복한 음모. 말하자면 텍스트와 같은 매개되거나 창조되는 '사물'로 비켜설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모두 짱똘과 쇠파이프를 들수는 없었다. 모두 거리에서 정치한다면 남는 곳과 것엔 누가 정치할까? 요즘엔 정치한 정치도 증발했다.

<노동의 새벽>에선 반감수성이 읽힌다. 자조와 저주는 자주적이지 않다. 감수성이란게 해방될 무렵엔 문화의 '자본주의식민화'가 함께 왔다. 밤손님과 친구가 함게 찾아온 게다. 하나는 창으로 또하나는 문으로. 굴뚝으론 산타클로스가 왔을지모른다. 그날이 크리스마스였다면. 적어도 내겐 산타가 선물들고 찾아왔다. 밤, 아버지는 수염두르시고 내 양말에 뭐하나를 두고가셨다.

84년을 직접기억하기엔 그때 너무 어렸다. 신문과 '금지된'tv로 읽히던 그런 세상은 내겐 없었다. 거리와 학교는 세상 평온했다. 누구나 그걸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였다. 누군가는 그걸 말했지만. 그런 친구는 교실에서 '특권층'였다. 영어선생은 친구 아버지의 친구였다. 친구 아버지는 노동운동과 대외협력일을 했다고 자랑했다. 그럼에도 또다른 친구는 '개장수'라고 불렀다.

그런게 노동과 권력, 감수성의 이미지다. 우회로가 필요했다. 뒷문을 따고 들어가려 생각했던 것 같다. <노동의새벽>은 '조선'과 대등한 뒷문이었다. 꽉막힌 비밀의 미로에서 세상알아가기!? "또 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90년대에 만난 친구들은 이 구절에서 '차거운소주'을 '깡소주'라고 불렀다. 2010년이 되면 참이슬과 '언소주'조차 등장한다.

현재는 언제나 진행형이다. 그래서 라도사람은 '잉'이라고 말을 맺는다. 90년대 감수성은 석방아닌 석방을 했고 수감이유는 84년 아침에 일어났다. 죄목은 늦잠이다. 노동장에 늦거나 결근하면 '노동형'에 처한다. 석방은 준비없이 됐다. 단지 출옥을 했을뿐인가? 면소판결이 없음은 물론이고 빈털털이였다. 감옥에서 냉동돼 배운것은 '뜨게질'뿐이다. 그래서 십자수를 잘 놓는다.

90년대 문화가 해방으로 치장되나 또다른 구속이 될 이유는 공소장에 언급돼 있지 않았다. 대저 가로되 당신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거나 정해진게 없다. 그러나 받아드리도록. 이런 세상이므로 난 90년대와 84년을 복원한다. 나의 세상으로. 나의 표상은 당신의 세상이 된다. 당신이 믿거나 믿지않거나 그렇게 당신의 영원한 영혼을 거둬드린다.

박노해 - 노동의 새벽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아...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 가지.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 가도
끝내 못 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쳐진 육신에
또 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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