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와 아시아, 국가와 나....넌 나에게 난 너에게 영화소개와평론


**글을 써둔건 두 영화 개봉하고 다음인거 같다. 필은 꽂혔되 전혀 감흥이 없었다. 워낙 급박한 일들이 계속되 나의 논의가 마치 외계인의 '몽상'같았기 때문이다. 오늘 시국은 더욱 급박해졌다. 전혀 핀트가 맞지 않는게 되버렸다. 후반에 최근에 쪼금 살붙여둔게 핀트맞추기의 최소한이 될지모른다는 심정 갖고 포스팅 내보낸다.

두편의
영화를 봤으나 '하얀사회'에 검은 얼굴은 하나 정도 전부였다. <솔트>에서 에브린솔트(안젤리나졸리)를 추적하는 윌리엄피바디(치에텔에지오프)만이었다. <인셉션>엔 전혀 없었다. 아주 익숙한 형태로서의 하얀사회, 하얀영화는 꽤 꾸준히 관철되는 것 같다. 미국의 영화평론가 메니 파버는 어떤 평론에서 주요 영화경향을 '흰코끼리'영화와 '흰개미'영화로 나눠 비판한 바 있다. 비판적 함의는 '영화적인종주의'다. 어떤 형식의 영화를 만들건 서구영화는 곧 '백인중심주의'며 잘 극복하지 못한단다.

이 비평이 등장한게 벌써 30년이다. 이제 서구영화에 아시안이나 흑인은 곧잘 등장하고 '영화적종범(accessory)'으로라도 그들은 역할을 한다. 영화를 이끄는 게 백인이라거나 남성주의가 팽배한다는 점은 쉽게 교정되지 않는다. '정치적올바름(politically right)'이 영화적올바름인가는 잘 모르겠다. 한국영화 또한 폭력묘사, 선정묘사, 상업화가 기승부리며 '인종/지역주의'라 부를만한게 등장한 것 같다. 정치적으론 올바르지 않고 영화적으론 모르겠다. 편견은 진실의 벽이다. 또한 벽에 달하면 벽에 대해 생각하게된다.

<인셉션>에 대해 어렵다는 평판과 '킥(kick)'과 '림보(limbo)'밖에 없다는 혹평이 있었다. 영화를 보는 어떤 오류때문이라는 지적을 해두고 싶다. 나또한 그런 함정에 줄곧 빠지지만 글을 쓴다라면 해석과 이해를 해야한다. 또는 누군가에게 들려주기위해 요약조차 할 사람도 많다. 영화를 보는 앵글이 아주 틀리며 만약 외화를 보는거라면 이젠 자막이 장벽이다. 이해를 위해 2시간짜리 책읽는 수고를 위해 일부러 돈내고한다는 점이다. 이런 문화에 영화가 설자리가 왜소해진다는 점은 분명하다.

<인셉션>에서 당신이 읽거나 듣거나 해서 미리 알게된게 아니라면 '킥'과 '림보'에 대해 알기는 어렵다. 여기에는 해당단어의 원뜻과 영화에서 의미화되는 그럴듯한 얘기(storytelling)가 있다. 만약 이것때문에 고민을 했다라면 당신은 영화와 이데올로기라는 그럴듯한 주제를 이해하는거다. 또는 영화의 서사가 짜이는 허브(hub)를 본건지도 모른다. 어느쪽이건 이런 의미작용을 어떻게 받아드려야할까? 그게 숙제다. 그런 얘기도 있다. 즐겨라(Enjoy!). 어쩜 자막때문에 고민않는 영어권 관객을 정말 '즐기며' <인셉션>을 봤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나나 당신이나 <인셉션>을 즐기지 않았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오해없길. 분명 우린 <인셉션>을 즐긴다. 그런데 사실 많은 사람들은 한번보고 이 영화를 충분히 알기 어렵다고 호소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영화평론과 소개글을 찾아읽거나 몇번 더 보는 수고를 하지는 않을 것 같다. 당신이 영화전문가가 아니라면. 그때부터는 정말 영화감상이 아닌 영화'공부'가 되는 셈이니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 당신이 어른이라면 영화까지 공부할 이유는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인셉션>은 복잡한 구조, 복잡한 의미구조를 가진 영화인 것 같다. 이런 영화의 특색은 매력적이며 마력적인 스토리라인이 심지어 미학적인 느낌까지 전달한다는 점이다. 복잡한 이야기구조에 매혹당하는건 '공부'와 '이성'이 강조되는 동아시아 3국의 영화감상 태도의 중요한 특징같다. 그중에서 특히 우.리.나.라. 영화를 뭐로 정할 것인가는 정말 정해져있지 않다, 이건 책에 대한 일반적인 태도와 같다. 왜 읽나? 어떻게 읽나? 뭘읽나? 와같은 고민을 하려고 무척 애쓰는게 안타깝다.

영화를 이야기구조로 보지 않을 때도 영화는 철학적이거나 미학적 습관과 관련있다. 그만큼 풍부한 텍스트며 뭔가 해독해낼게 정말 많다는 점이다. 연전에 그런 말이 유행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 보는 만큼 안다. 앎은 '인식'의 문제며 봄은 절대적 인간권능의 영역이다. 꽤 어려운 말이 쉽사리 퍼진 셈이다. 이런게 나쁘다고 할 생각은 없다. 나또한 이런 사고에 침식돼 있고 많은 우리들이 그렇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 그런 평가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경제주의다.

영화를 통해 관객은 적은 돈에 재미를 보지만 그 액수가 쌓이면 아주 큰 자본이 되고 다시 영화를 재생산할 바탕이 된다. 그렇지만 그런 목적의식을 가지고 영화를 본다면 꽤 재미없는 하루가 될 것 같다. <인셉션>에서 본전뽑자는 얘기가 아니다. 이 영화를 가장 잘 보자면 차라리 영화대본을 보는게 더욱 나을 것 같았다. 결국 일종의 지루한 설득이데올로기의 끝에 온 셈이다. <인셉션>을 그냥 봐선 얻을게 별로 없을 것 같다. 간신히 이해되는 줄거리와 몇몇 즐거움들을 주는 영화다. 그런데도 나와 당신은 이 영화를 좋은 영화라고 한다.
 
<솔트> 단순하다. 서구 철학과 미학의 어려움이 덜 개입돼 있다. 굳이 배후의 뭔가를 찾는다면 프래그머티즘이랄까? 미국인들만의 단순한 쾌락주의가 딱 영화요금 만큼 들어있다. 나라면 <인셉션>보다 <솔트>를 더 좋은 영화라 하겠다. 교보문고 벽돌엔 이렇게 쓰여있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고. 이 문장에서 책을 영화로 대체하면 좀더 영화에 관해 좀더 본질적인 해석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람이 만든 형이상학이 물화돼 사람에게 되먹임(feedback)되는게 많은 영화의 핵심이다.

그런걸 영화이데올로기라 부를만하다. 그러한 앨고리듬(algorithm)의 어딘가쯤에 나와 당신은 배치되어 정말 헤메고 있다. 이런게 <인셉션>의 메타포라 부를만하다. <솔트>엔 없는 <인셉션>의 메타포며 미학의 일단이다. 반면 <솔트>는 꽤 명료하다. 영화를 사고와 생각, 더나가 철학과 미학, 정신분석학의 이해를 위한 수단으로 쓸 동기가 없다면 <솔트>를 보는게더 나을뻔했다. 물론 한가지는 남는다. 유행이랄까 관계랄까? 구속하는게 어쩔 수 없이 <인셉션>으로 밀어넣었을 때다. 

영화를 사랑한다라면 <솔트>가 훨씬 나았었다. 안젤리나졸리와 동료들이 주는 속시원한 쾌락과 또다른 것들이 훨씬 나았다. <솔트>는 정치적으로도 훨씬 올바르다 하겠다. 좀더 솔직하게 내보여주는 속감정과 속세계는 현대미국과 그들의 문제를 훨씬 이해하기 쉬웠다. 문제는 <솔트>를 반공영화쯤으로 치부하기 딱 좋은 측면이 있다는 점이다. 방금 '소환'당한 소련스파이들과 그들의 과격성은 현대 미국에서 여전한 공산주의의 위상, 이데올로기적 위상을 함께 짐작할 수 있었다. 

<솔트>. 헐리우드 오락영화의 갱신성과 안젤리나졸리의 퍼스낼러티를 봤다. '스파이'와 방첩기관의 숨막히는 대결, 현존하는 위협 '미러열강'의 헤게모니다툼. 감초처럼 영화의 첨엔 '북한'도 등장. 인상적인 부분은 영화 막바지 헬기에서 '스파이'솔트와 흑인 정보부원 사이 대화였다. '미국'에 솔트같은 스파이는 한명도 없지만 그렇지않은 스파이는 수만명이 된덴다. 일전 어떤 안기부원이 한 말이 인용된걸 읽었다. '국내에 자생적 세력 말고 북한 지령을 받고 암약하는 고첩이 4만명이라'했고 충격적이었다.

<솔트>의 자국사정에 대한 인식은 이와 같았다. '아메리카니즘'이 꾸준히 등장했고 '반공영화'로 인식되기 딱 좋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세상과 들려주는 얘기는 그렇게 평평한게 아니다. <솔트>를 <인셉션>과 함께 살폈다. 글이 의도했던 '가깝고 먼 하얀사회 검은 얼굴'을 들춰내는덴 실패했지만 몇가지 보탬되는건 정리한 셈같다. 영화를 좀 쉽게 즐기려했지만 그게 외국영화일 때 문화, 언어같은건 정말 장벽이 된다. 그런게 십분 감안하고 나와 당신에 보탬되는 영화를 보려한다. 

'반공주의'는 정말 숙제다. 세계화된 사회에서 인종과 다민족의 불협화음이 숙제라 생각했는데, 느닷없이 '반공주의'열풍이다. 인용했던 문구 처럼 아주 어려운 문제들이 많고 얽혀있으며 한 숙제를 풀기도 전에 또다른 숙제가 제출된 기분이다. 이런거의 뿌리는 멀까?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공통지반이 된거 '국가', '우리나라'의 문제는 아닐까? 어떻게 '국가'를 인식하는가의 차이는 여러 문제를 파생시킨다. 넌 나에게 어떤 의미며 난 너에게 어떤 이유가 될까라는 해묶은채 풀지 않은 숙제.

국가와 문명은 원래 인간이 야만과 대적하며 결성한거다. 만인을 위한 만인의 투쟁과 전쟁을 회피하고저 제출한 공동답안은 국가였을까? 되려 국가성이 인종성, 다민족성과 더불어 문제로서 부메랑이 돼 돌아온건 아닐까?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 국가나 정부를 폐지하라 주장한다면 오류다. 심지어 작은 국가와 정부조차 일정한 오류를 가진다 본다. 시급한건 그러한 모든게 정상화해 안정모듈안으로 들어오는게 아닐까? 위기와 위험을 배제하려는 공동담보로서의 여러가지는 재소환되는게 좋을거 같다.

우리라면 역시 안전보장을 위한 튿들이다. 그게 6자회담이 될지 군사력강화와 여러 군사훈련이 될지 모른다. 난 모른다. 평화가 공동의 열망이란게 당연하고 그걸 위한 생각의 여러 차이들. 프리즘에 걸려 무지개 처럼 영롱해진 다른 생각들. 다른 생각과 차이에 주목하는건 어쩜 시대의 가치다. 어느 방향으로건 주장했다라면 다른 생각은 배척되진 않아도 거부되고 거절된다. 영화  두 편 본거 갈무리하며 프리즘에 걸린 무지개빛 영롱함의 빛깔들에 생각이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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