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일요일 위시리스트에 올렸던 다큐 한 편을 그냥 봐버렸다. 시각환상에 매혹된 자에게 다큐란 꽤 고풍스런 체험일거 같다. 이미 덮은 책을 다시 여는 기분. 2003년은 그랬다. 나도 그랬고, 그도 그랬고 모두들 정말 그랬다. 근데, 당신은 그때 뭐했나? 당췌 그 심각했던 사건들이 여적 가물가물한 이유는 멀까? 다큐는 기억의 작용 보다 더 힘세다.
2003년부터 2008년까지 기억하기!! 정신에 깃발이 나부낀다. 이 난리도 아녔던 시간들은 정겹게 평화로웠을까? 내가 지지하는 측이 정권을 쥐고있었다는 생각/사실은 기억마저 정치화하는가? 기억은 현실의 영토다. 그런게 기억이다. 결코 공평하거나 공정할 게제가 없는게 기억이다. 기억은 정치적이다. 이제 여행을 떠난다.
2003년은 참여정부가 정권을 연 해로들 많이 기억한다. 그리고 그 지평에 송두율 사건이 있었다. 공교롭게 이 다큐엔 참여정부에 대한 실마리가 거의 없다. 몇몇 참여정부에 비판적이었던 인물만 마냥 등장하지만 참여정부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는다. 대신 등장하는게 있다. 당대의 공룡 야당과 보수적 세력에 대한 비평이 일말 등장한다. 이 다큐는 멀까?
기억이 놓칠 때 미디어와 필름은 그 대리자로 등장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내 기억으로 포함된다. 이런 현상은 아주 흔하다. 7,80년대를 잊거나 모르는 사람에게 그 때에 대한 다큐라면 꽤 건강한 기억을 새로 얻는 게제다. 그리고 그 사람의 내 역사는 그렇게 굳어진다. 사람이란게 임플란트기억에 대해서 시험을 할 까? 건강한 그것이 얼마나 공정하고 공평할지 시험을 할까? 난 한다고 믿는 쪽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원본이 도착할거라 믿지는 않는 쪽이다. 원본이 휘발된 자리에 다큐 한 편 남았다.
오래전 일기장이나 사진첩을 열 때가 있을게다. 부적절한 비유일까?? 친구집에 가서 혼자 있던 방에서 친구 책상 위의 일기장을 몰래 본 적이 있다. 혹은 친구가 보여준 가족앨범을 본 적이 있다. 그게 기억이다. 기억은 그렇게 형성된다. 증발해 잊은 자리에 그런 것들을 통해 새 임플란트기억을 이식받을 나이가 벌써 됐나?? 나이 많이 먹지 않았지만 기억의 지도엔 공백이 꽤 많다. 아주 어릴 때는 거의 기억이 없고 나이들어서도 듬성듬성 까맣게 타버렸다.
기억을 제대로 한다면 내 기억나이도 내 나이와 똑같아야 한다. 지금 나이만큼의 시간을 회상하려면 앞으로 그 만큼을 회상만 하며 살아야하지 않을까? 그런 후 한번만 더 그 기간을 다시 회상할 때 죽음이 문턱에 도달했음을 알지니. 기억이라~~ 다큐란 쟝르는 기억과 관련이 깊다. 모름지기 재현이나 기록의 운명이 그렇지만 다 기억 못하는 인간의 팔자를 대신 물리적으로 집행해준다.
<경계도시2>의 104분에서 시작과 끝으로 커버하는 시간대는 2003년 송두율 교수의 입국직전부터 나레이션을 통해 2008년 그의 혐의가 법원의 판결을 통해 벗겨지기까지다. 무려 5년여를 104분에 압축하고 있다. 다큐는 별로 극적이자 않았다. KBS시사다큐에 익숙한 자로서 선정적이고 선언적인 그런 다큐의 문법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방송사 방영의 다큐는 시사와 역사를 묵시의 시간으로 호명한다. 어느순간 시계를 멈출 작인이 또렷하게 각인됐다고 심리에 미묘한 트라우마를 남긴다. 내 트라우마인지 브라운관의 트라우마인지 구별되지 않은채로 묘하게 물아동체의 지경을 연다. 이게 나쁘다는 얘기다. <경계도시2>의 다큐도 머 그런 기제에서 얼마나 멀리가있는지 분별을 해야할지 모른다. 인간이란게 도구와 연장을 사용치 않으면 자기의 소우주에서 나가기 힘들다. 그런 점에서 브라운관도 도시극장의 다큐도 연장이며 도구일지 모른다.
송두율 사건에 대한 100권의 책과 100부의 신문과, 100편의 프로그램을 읽고 보면 머가 달라질까? 그 분량의 기억이 생기면 우린 진실을 위한 나침반을 얻은 것 일까? 다큐 한 편으론 부적절 할까? 다큐 한 편 도구삼아 연장삼아 보면 좋을까? 나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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