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테러 라이브 - 어떤 폭력사태의 바로 그 생방송 영화소개와평론

또는 바로 그 폭력사태의 어떤 생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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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관사는 라이브를 꾸미고 테러도 라이브를 꾸며서 '어떤 폭력사태의 바로 그 생방송'으로 의역했으나, 정관사가 테러를 직접 꾸미는 것이고 그것에 라이브가 연접되는 것으로 해도 무방할 듯. 그 경우 '바로 그 폭력사태의 어떤 생방송'으로 의역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한 경우들에서 해석을 두 가지로 모아 볼 수 있는데 각각 생방송 자체에 방점을 두는 것, 폭력사태 자체에 방점을 찍는 것으로 할 수 있고, 그것은 각각 1) 어떤 폭력사태의 바로 그 생방송 2) 바로 그 폭력사태의 어떤 생방송이다. 문장이라는 것은 묘해서 의역문들을 독해하기에 따라서는 강조하고 있는 것들이 또 다시 반대로 읽힐 수도 있을 것이지만 하여튼 무엇을 강조하는 것이고 그것에 관해서 정관사가 꾸미는 것을 각각 상정하여 두 가지의 경우로 나눠봤지만 사실 의미란 항상 열려있는 것이고 좀 더 자유롭고 주관적인 의미부여는 가능할 수 있는 것이지만 스쿨 그래머가 판단하는 것으로는 내 두 구성이외에는 틀린 것으로 판단할 것 같고 심지어 스쿨 그래머를 존중한 내 두 구성도 어떤 하나는 배척될 것 같으며 두 번역문을 사용했지만 심한 의역인 것이고 정관사가 꾸미는 경우를 두 가지로 생각해서 서로 상이한 두 의미부여가 가능할 수 있다라는 취지만을 보이는 것이다. 의역을 하면서 영화자체를 참조했는데 그것에 의해서 종국적으로 그 영화의 제목이 가리키는 것은 폭력사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생방송 자체라고 판단했을 뿐이다. 영화를 보는 시각은 상이하므로 그 영화의 제목이 가리키는 것의 중점을 폭력사태 자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내 판단에서 강조점을 두는 행위가 어떤 시각에서는 틀리거나 다르다고 보일 수 있는 점이고 그 경우 그들은 두 번째 의역조차도 틀리거나 다르라고 할 수 있는 점이며 영화의 제목이 환기하는 것을 전혀 틀리거나 다르게 생각할 수도 번역할 수도 무시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단지 내 영화보기의 결론에서 그 영화의 무난한 의역 제목을 '어떤 폭력사태의 바로 그 생방송'이고 그러므로 그 영화 제목이 가리키는 것은 생방송 자체라는 것을 정하는 것일 뿐이다. 폭력사태도 생방송도 영화적 재현물이지만 누구도 재현물이라는 입장에도 동의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고 설혹 동의해도 아주 많은 상당수는 꼭 생방송 자체의 재현성만 동의할 뿐 폭력사태의 재현성에는 각별한 다른 의미부여가 꼭 있을 것만 같다. 생방송도 영화적 재현물이고 폭력사태도 영화적 재현물이지만 그러한 의미부여가 존재한다라면 생방송과 폭력사태에게 주는 값이 다르다라는 점인 것이다. 영화적으로라도 생방송과 폭력사태는 등가물이 아닌 것이고 사회적이었다고 가정했어도 생방송과 폭력사태는 등가물이 아닌데 평균적 관객은 영화 재현물의 경우든 사회적 실재의 경우든 생방송 보다는 폭력사태에 더 높은 중요도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 사실은 어떤 경우로라도 폭력사태는 재현되는 것이라는 점을 괄호속에 넣어 버렸다.  

2) 그러면 그 영화는 '사회적 공격'과 '과학적 망상'에 관한 영화인 것인가?? 이것은 내 두번째 질문이다. 과연 그런 것인가? 그런 것은 실재하는 것인가? 사실상 실재는 두 가지가 있다. 객관적 실재와 주관적 실재. 사회적으로 유효하게 정립되는 실재와 주관적 심리와 감상으로서의 실재. 충분히 관찰 못하는 세상과 불충분한 실험실에 대해서마저도 사회과학방법론들은 관찰효과, 실험실효과를 부작요으로서 지적해 두고 있다. 누군가 세상을 관찰하는 순간 또는 실험실에서 유효한 실험을 하는 순간 역습이라고 할 만한 '역동'이 일어날 수도 있다라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고 데이타로 의미부여로 환원되는 데에서 많은 잔차가 생기는 것이고 그것들은 전혀 다른 말들을 할 수도 걸 수도 있으며 실제로는 그러한 관찰, 실험실을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하면 할 수록 그 정도에 비례에서 값은 많이 달라질 뿐만 아니라 어떤 추상적 실재를 또 다시 상정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대체로 관찰과 실험실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 듯 하지만 실제로는 관찰도 실험실도 그 결과치를 읽어 보면서 의심하거나 회의적이었을 뿐 관찰 경험, 실험실 경험이라는 것이 내가 내 주도하에 완벽하게 체계를 잡아 통제하고 계획적으로 해 본 바는 없을 뿐이고 참여자, 보조축으로서의 경험들만 다수 있다. 대체로 두 가지 방법론을 기억하고 있지만 관찰, 실험실로 대항목으로 분류해도 무방할 듯하고 전문적인 연구자라면 내 경험적이거나 이론적인 생각들은 무시해도 좋다. 영화를 어떤 구성되어진 세상의 축소판으로 보는 경향을 갖고 있지만 그것이 꼭 영화가 아닌 문학이거나 회화, 사진 기록물이라도 기실 어떤 통찰 이상의 것을 주지 못한다라는 것은 연구자가 연구 결과물을 피드백하면서도 자신의 주관, 주장을 개입시키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를 갖는다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연구물이 아닌 것이고 그러한 공식적 정의는 이미 아주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고 그런 것을 도외시하더라도 영화는 결정적인 문제가 하나 있다. 픽션의 픽션효과라는 점은 심지어 그것이 다큐멘타리물인 경우에도 노정되며 문학, 회화, 사진 따위의 경우에도 거의 비슷하다라고 할 수 있다. 픽션효과, 더 나아가 환상효과는 좀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인데 많은 사람들은 많은 이유로 많은 영화들을 보면서 어떤 통찰들을 얻는데 그것들이 갖는 픽션으로서의 환상으로서의 치명적 결함을 생각해 봐야 한다. 사고적 교정, 보정을 한다라 할 수도 있고 누구나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는다라 할 수도 있는데 영화가 사회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주는 것들을 신뢰하기는 어렵다. 어떤 통찰을 줬고 얻었다라는 경험은 조금만 따져보면 영화의 픽션효과, 환상효과의 범주의 내부일 뿐이다. 지속적으로 사고를 형성하고 보완해 가는 것들은 참 많다. 독서가 그렇고 텔레비젼이 그렇고 뉴스가 그렇다. 갈수록 픽션화, 환상화되어가는 지점들은 영화와 유사하다라 할 수 있고 다른 경우인 관찰도 실험도 과학도 다른 경우로 픽션화, 환상화되어 가는 것이고 다른 이데올로기로서의 과학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는다. 남는 것은 무엇일까? 믿을 수도 신뢰할 수도 없는 '내 로고스' 하나일뿐일까, 감정들, 수 많은 사람들에 치이지만 자신의 로고스를 준거점으로 삼는 것은 인간의 팔자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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