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바꼭질 - 숨박곡찔로 하지 않습니다 영화소개와평론

우리는 그렇게 된 마당에도 기본적인 공유 지반, 그 최소공배수의 전망을 찾고 있다라는 점을 영화에서 반드시 동의해야 했을까?? 같은 동물로 태어나 다른 사람들인 우리들은 곳곳에 설치된 저지물마냥 우두커니 서서 고민하고 번뇌하며 흔들리고 유동하는 생각하는 갈대. 그런 놀이를 즐길 연령을 대부분 개차반으로 넘어 왔고 넘겨 주는 신세인 너와 나, 우리들은 이제 놀이를 더 이상 하지 않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놀이란 배정되는 것이기에 선택하는 것은 아니기에 미증유의 자리에 잘못 있게 된 점에 관해서 생각하는 편이 더 났습니다. 대개 그런 것 처럼 놀이의 어떤 하나도 궁극적인 꼭두를 지향하나 실제로의 내가 지양되는 그런 관계이지요.

1) 영화를 보면 영화를 봤는데 기실 알 수 없는 것이 여실히 계속 등장하게 되고 알게 된 편이 나쁘고 그러한 인식의 영도라는 점은 특징적인 부르쥬아 사회의 여과를 나도 삼투압하고 있구나 새삼스레 확인하는 것입니다. 영화의 주어진 것으로서의 서사라던가 테마를 수긍하면서도 무언가 석연치 않은 지점들, 그 균열부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서사의 갈라지거나 찢어지거나 깨진 부분들은 사실상 저절로 등장하는 것이지요. 단지 우리들은 그것을 별로 인정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라는 질문을 무심결 하기도 하겠지만 별로 공약수로써의 해답 말고는 우리는 얻게 되는 것은 없구나 합니다. 

서사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개발된 장치입니다. 대중의 진보 의식을 가로 막으려고 누군가가 장구한 역사에 걸쳐 고안했고 그 구체적 실행에서는 나도 당신도 나와 당신의 부모나 조상도 한 몫 모두 거들었습니다. 거의 모두가 다 참여했지요. 그렇게 된 것이 궁극에 와서는 그저 존재 양식의 하나로써 사방에 심지어 당신의 매트릭스에도 있을 뿐입니다. 영화에도 내 머리와 박통의 머리에도 단지 구별만 될 뿐 본성상 같은 것으로 있고 그 점을 서로 알고 있고 다만 객관적인 존립의 위치, 위상이 달라서 서로서로들의 행태는 전혀 다르게 되는 것일 뿐이지요. 이건 나도 누군가도 거의 같이 알고 있어왔던 사실입니다. 

그러면 그것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수거나 파괴하기라도 해야 하는 것인가? 바랄 것을 바라는 것이 좋다라는 점은 현대사회의 거의 모든 것들이 심화되어 갈수록 더욱 분명해집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입니다, 또한 존재는 언어의 집입니다. 그것들과 개체들과의 관계는 언어와 존재의 관계, 혹은 존재와 언어의 관계로 유비해도 좋을 뿐입니다. 그러한 작업들이 부질없다라고 할 수 있는 이유지요. 비판적으로 텍스트를 읽고 보아도 그것들을 해체하거나 역전시키는 도정에 있어도 그것이 실제로 확인하는 것은 그것들이 단지 부르쥬아 사회의 유산의 일단이며 그 연장선상에 놓인 것이라는 재귀적 확인을 추가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우리들은 남는 게 거의 없을 도정에 들어 와 있는 셈입니다. 거의 막인 장벽 수준의 인해, 인산을 목격하는 절차를 영화적 재생 행위를 통해 무심결 재확인, 재강박하는 것이지요. 텍스트(영화)를 읽고 봅니다. 그 사이 사이의 빠져 나갈 구멍들을 찾거나 그 속으로 스며드는 순간 기형도의 운명을 생각하기도 하는 경우만 왕왕 있습니다. 이 보수적인 시인은 죽으면서까지도 자기가 설파하고자 했던 것들을 충실히 착실히 잘도 설파한 셈입니다. 영화가 만들어 왔고 그러한 영화는 대중에게 희망과도 같은 것을 사막 안의 오아시스로써 제공했고 우리는 그게 실체인가 신기루인가 아직 잘 모릅니다. 

2) 영화의 줄거리를 스포일러를 참조하며 짧게 요약하면 그렇습니다. 주인공(손현주)은 안정적인 중산층 가장이었는데 어떤 계기들로 인해 남한의 숨어사는 사람들과 이어집니다. 주인공은 당연히 그러고 싶지 않았으나 그게 그의 객관적 필요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부라고도 할 수 있는 그들과 객관적 관계의 모순에 조응하는 대립을 겪고 전쟁을 치르다시피 하는 혼란, 갈등, 충돌을 하다가 주인공의 승리는 체현됩니다. 여기서 영화적 퀴즈는 따로 제시되는 셈입니다. 그러면 나는 누군인가, 혹은 나는 누구일까? 다른 식으로 하면 우리들은 누구였을까, 혹은 우리들은 누구인가?

대부분의 남한 영화들이 헐리우드의 영화의 서사를 모방해 온 것 처럼 그 실상의 결말과 어두운 결말은 사람들 마다 그것 참 희한한 생각들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의 영도를 생산하게 하고 싸이의 최근 노래, 뮤직비디오 처럼 그것들이 유행적인 현상으로 후기 현대의 리싸이클링 작업의 가장자리로 영화인들을 내모는 현장을 떠올릴 수도 있겠습니다. 이미 영화의 팔자가 대중예술이라는 순조로운 네이밍에도 불구하고 한계화되어 버린 영토에서 참다운 것들의 영도만을 그들은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화 서사가 제공할 수 있는 혁명 서비스도 더 이상 없습니다. 영화는 대중을 잠재울 뿐입니다.

말년의 중앙일보 기자였던 기형도는 홀로 동시상영관들을 전전했지요. 마감 탓에 야근을 밥멋듯 하던 고참 기자들의 생활상은 싸우나도 적던 시절 동시상영관에서의 수면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만 합니다. 기형도는 영화를 매우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보다 죽은 기형도는 영화 속으로 빨려들어 가지 않았을까요? 그의 마지막 작품은 '애마부인'이라고들 하던데 분명치는 않습니다. 영화가 대중과의 관련에 이어 지식인과의 관련을 갖게 된 것은 영화가 스스로의 지반에 이어 스스로의 이데올로그를 찾는 역사적 노정의 결과입니다. 지식인들은 대체로 영화를 좋아하거나 사랑합니다.

영화를 난독하기도 하고 정동을 배우기도 하는 장으로써 재정위하려는 노력들의 일단을 알고 있습니다. 숨바꼭질에서의 난독이나 정독은 더러 더러 새로운 효력들을 갖게 되기도 할 것 같습니다. 단지 평면 위의 수평적인 인간들을 계급으로서나 역-계급으로써나 저절로 절로 절로 묶을 수 있는 어떤 신비로운 가망성을 주술 처럼 믿기도 빌기도 하여 봅니다. 이 또한 영화이론의 초계급들이 믿기도 증명하기도 했던 것들입니다. 실제로는 효력이 없다라는 것을 나도 또 한 번 재차 확인하였지만 그 신비로운 상상의 지평 위의 무대륙을 감상하는 내 영화는 참 재미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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