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범 - 아렌트의 음악상자 영화소개와평론

버블, 포켓, 그리고 캡슐.
대중 언설의 바른 장에는 어떤 서로 관계없는 말들이 등장하기도 하여 거의 꾸준히 반영구적 트루우마를 생성하는 것이고 그것들은 또 어떤 다른 나머지들(빙산의 뿌리 처럼 실제로는 더욱 큰 것들)과 의미를 교호하며 다시 다시 새로운 것들을 상징자본의 장으로 낳을 것이며 그것들의 현좌표에서 전혀 다른 '기표/기의'의 의미층들은 당신과 나의 뇌에 새겨질 것이다. 그 뇌새김이 가동되면서 생각의 근육이나 뉴런의 근육이나 세상의 유물적 근육의 그 모든 수준, 층위에 흔적을 영구문신으로 남는다. 대저 어떤 영화도 그런 것들의 지점에서 바로 그 문신과 같아 영구적이고 낙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낙인은 영화의 내부 수준에서나 영화가 사회와 세상으로 열린 수준에서나 같은 대칭적 효과를 같는데 그것들은 '정치적 무의식'이 되어서 대중들의 가동되는 정치학의 최면술이 된다. 별로 무관해 보이는 다수들이 밀접하고 조직적으로 유기화하여 심지어 초계급의 어깨위에서도 구관조의 불면의 꿈 속에서도 지겨운 검은 말이 된다.

1) 영화를 볼 때면 서사를 고민한다. 서사는 유기적이어서 그 공식적 서사를 그렇지 않은 비공식적 서사(들)과 연결하는 접점들도 있을 것이다. 접점이 중요한 것의 전부는 아니지만 비공식적 서사를 어떻게 생각해 보면 결국 또 다른 공식적 수준의 것들로 환원시키는 것이 마땅하여 보인다. 서사가 개인적 수준에서 형성되는 층위라던가 집단적 수준에서 최대공배수를 산출하는 수준과 같은 것은 증명적으로 확인하려면 아주 많은 시간, 비용, 노력이 들 것이다. 현대 서사가 궁극적으로 겨냥하는 지점이라는 것들은 결국 공식서사, 비공식서사(들)을 지양하면서 개인적 서사와 집단적 서사의 영역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자본의 지난한 움직임과 유기적으로 결속된다. 지배적 층위가 무용할 수 있고 고비용/저효율의 차악이 될 수도 있는 마당이고, 또한 어떠한 갱신 운동의 내적 발전 논리도 꾸준한 것이다. 참담한 딜레마가 생기는 이유다. 당신은 포커를 해 봤는가?? 확인이라는 것이 있다. 포커에서 지는 마당에서도 포커의 논리는 진자가 이긴자의 패를 알 수 없게 하며 아마도 이긴자의 패를 알 수 있는 자는 어떤 특별한 자뿐일 것이다. 그래서 생긴 절차가 확인이다. 진자는 비용을 더 치루고 확인이라도 할 수 있고 이 나마 이긴자가 거절하면 어렵다. 확인을 하는 공식적인 이유는 포커의 적인 사술을 검증하는 테스트적 효력이다. 물론 전혀 완벽하지 않다. 서사가 작용하는 수준에서라면, 서사 공급자는 말하자면 진자이고 대다수의 서사 소비자는 이긴자들이다. 전형적으로 구조화된 이 상황은 자본주의 사회 역학을 역행하는 것으로도 보이고 민주주의 구성 원리인 다수의 승리를 순행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하여튼. 개인적 서사와 집단적 서사에 공드린다라는 것이다. 내부 발전운동의 논리에 비중을 두는 편인데 그 결과로서 공식서사, 비공식서사들에 이어서 개인적 서사, 집단적 서사를 작용하려는 것이다. 그 경우들에서 수 많은 승자들의 포커패들을 확인해야만 할 것이다. 기초적인 경우 추론과 연역을 사용하는 방법이 저비용이라서 일반적일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발전 운동의 욕망, 전망에서 개인화된 서사의 영역과 비대한 집단 서사의 구조화된 영역을 알아 내고야 말 것이다. 단지 우리들에게 유보되고 차연되는 것은 시간(t)뿐이다. 그야말로 시간 문제라는 말이 딱 맞는 것이고 유기적 기계 비율까지 적용할 수 있다라면 난 그 시간(t)도 어떤 의미에서는 예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서사가 개인화되는 양식의 유효성을 굳이 최근화 갱신시킨 이유는 두 타입의 세대 논리때문이다. 후세대의 어떤 속성값은 그들이 그런 제공을 선호하고 선화하는 문화를 양식화시키는데 성공했기 때문이고 전세대의 어떤 속성값은 그들은 그런 제공을 전혀 선호하지 않고 문화적 봉쇄를 하였지만 돌파되는 임계적 시간(t)을 자연적으로 초과했다라는 점이다. 문화-기술의 결합 비율의 성공 속에서 그러한 예술, 영화는 성공적으로 출시되고 있었다. 

2) 후기-현대에서 '주관적 유물론자'의 제국이 되어 버린 것이고 우리 모두는 기사이며 영주이며 초계급은 철회되었다. 객관적인 것들, 관념적인 것들의 영토는 어디에 있을까?? 다시 시간(t)의 문제가 소급되는 지점들이고 당분간 그것들의 영도로 우리는 안전할 수 있다. 아직 그 발전 운동은 시간(t)의 문제는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당분간 개인적 서사, 집단적 서사의 문제에 공력을 쏟아 의미있고 유효할 결과치를 발효시키는 데에 매몰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설혹 시간(t)의 문제를 선택하여 공력을 붓는 다라면 그것은 투트랙의 문제가 되어서 결과치가 1/2씩으로 나뉘던가 전제척으로 도달하는 것들은 지연될 수 있고 전혀 새로운 방정식이 등장하더라도 그것은 우리를 위한 저지물이 될 수도 있어 일단 개인서사/집단서사의 유기적 비율만을 다루고저 한다. 

개인서사란 일종의 맞춤 서사이고 전혀 개별적인 장에서 저절로 구현되게 우리들도 코딩되어 있고 우리들이 인간이가에 우리들이 동물이기에 또는 우리들은 식물이기에 전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것들이 정교하게 유기적으로 결합한 그 층위라면 그것들은 집단서사로써 변형되기도 다른 위상에서 그렇게 관찰될 수 있다. 결국 개인서사의 총계와 집단서사의 비율은 1:1이지만 그런 것은 기실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면 모두 다 개별자의 수준에서 개별적으로 조작되거나 잘게 잘게 그룹화되어서 그룹적 수준에서 조작되며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며 집단서사의 조작은 말하자면 통제항목의 성격으로써의 규정성을 갖는다. 그것에 안전장치로써 기성의 수많은 공식서사, 비공식서사들이 상시적으로 작용되는 것이다. 우리들은 여기에 태어나 자란 후 3가지 친구를 얻은 셈이다. 이로써 많은 문제가 해결된 것이고 사람에 따라서는 많은 문제가 생긴 셈이다. 

선택을 말 할 수 있을 것이고 여기서 아렌트의 문제가 등장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생존할 수 있는가?? 우리들은 저마다의 윤리학의 수준을 구현하며 생존할 수 있는가?? 종의 문제로써 치환시키는 유기적 관념이라는 구식 도구가 필요할 수도 있고 저마다의 프래그머티즘은 본 가정들에서는 배제되는 것이다. 영화에서 정다은(주인공 : 손예진)은 아버지가 중범죄자이며 그것을 알아가는 게 그의 살아있는 트라우마이다. 결국 그것들의 진실이라고 인정되는 바는 드러나는 것이고 아버지는 대속의 구조로 죽고 모호한 상황 속으로 정다은은 깨어난다. 정다은은 어쩌면 평범한 성공의 화신이 될 수도 있었지만 어떤 균열부 사이로 과거의 에너지들이 비집고 들어오고 그것을 승리하면 할 수록 부친의 실패로 승화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정다은의 극중 세대, 현실 세대가 후세대인 점에 주의해 보라!) (또한 당연스레 정다은의 부친이 전세대인 점도 기억하라!) 

영화는 공식서사와 다른 비공식적 서사가 맺어져 있다라 기억된다. 난 그것들을 대단한 발견이라고 치부했었으나 단지 이미 구조화된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고 한 동안 참 신기했지만 지금에 와서 보니 그것들은 비공식적 수준도 아닌 것이 개별화된 자기 서사의 재발견이라는 느낌이고 어떤 집단적 무속이 그것에 기여한다라느 느낌이다. 결국 커뮤니케이션을 갖는다라 하더라도 연구, 분석, 발견되는 영역은 있되 그 영역이라는 것은 후기-현대의 중요한 자산일 것이고 그건 다른 말로 프라이버시라 하여 어떤 지시에서 역-금지를 당하고 있지만 그런 것에 동의해야 하는가 하는 점은 달리 생각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지만 객관적 금기에 조응하는 것으로 한다. 객관적 금지에 조응하는 네거티브 리스트를 따르는 것으로 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포지티브 리스트가 주어져 있지만 네커티브 리스트를 구성해 내는 것은 더 중요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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