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 정유재란의 시작 영화소개와평론

미국 영화라면 종말전, 최후의 날의 전쟁을 다룬 영화가 꽤 있을 것 같았지만 인류끼리의 전쟁, 또는 인류 대 다른 생명체간의 전쟁으로써의 종말전, 최후의 날의 전쟁을 다룬 영화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불가해한 현상도 아닌 과학적인 현상으로써의 미래 재난과의 전쟁을 종말전, 최후의 날의 전쟁으로써 취급한 영화나 쫌 기억나는 듯 하고 이 부류의 영화란 반-판타지 영화를 가리키는 것이니 판타지물로써의 종말전, 최후의 날의 전쟁을 가리키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고 보니 군대가 등장하고 정치가 등장하는 형식의 SF물도 있는 것도 같지만 내가 가상하는 종말전, 최후의 날의 전쟁과는 쫌 생소할 것 같다. 종말전, 최후의 날의 전쟁을 취급하는 영화라면 기독교적 궤적을 가상하는 것이고 그게 SF물이라면 불만인 점은 그게 판타지물이라서 불만인 것과 같다. 그러한 고정적 이야기 도식에 대한 가상을 어디서 주입되었을 것이냐 하면 잘 알 수도 없지만 그러한 것이 그러한 영화의 올바른 도식이라는 잠정적 가상을 나는 갖고 있는 것이다. 종말전, 최후의 날의 전쟁을 영화로 체현하려면 신학적 테두리가 제공하는 리얼리즘 밖에는 뾰족한 수가 없을 것이고 황당한 판타지물을 배제할 때 SF물이 남겠으나 SF물이 체현하는 안티-리얼리티는 그다지 많이 바람직하지는 않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종말전, 최후의 날의 전쟁이 체현하는 서사구조를 넘는 이데올로기 구조를 고전적으로 체현할 때 그것은 쟝르적으로 판타지, SF 쟝르를 피하는 것이 영화적 올바름의 체현된 가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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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이 없는 곳, 종말의 사회적 체현이 사회적으로 심각하게 가상되지 않는 곳에서 종말을 대체하는 것이 최후이다. 실제로 우리 영화에서는 최후를 다루는 영화는 왕왕 있어 왔다. 위인, 군인, 정치가, 왕들의 수많은 다채로운 최후는 보통 비극의 구조를 갖고 있었고 우리 사회의 면면한 정신분석학적 기반으로써의 우익적 정서, 곧 우수를 내포해 볼 만한 영화를 왕왕 산출하여 왔던 것이다. 내가 알고 있기로 이 대표적 민족 정서, 이 대표적 우익 정서의 기원은 일본 같고 독자적으로 고유한 이 정서의 뿌리는 우리 내부에서는 없던 것과 같다. 실제로 어떤 것은 우리 내부에 없었는데 이식, 동화 되면서 우리 내부와의 대상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며 그러한 패턴을 보편적인 것으로 인정할 것인가 열등한 특수성의 소산으로 볼 것인가 하는 점은 우리 정신분석학의 과제이다. 우수라고 네이밍하기는 했지만 그러한 이름을 정했을 때 그 이름의 크기가 주는 공명은 실제로 그것이 가리킬 수 있는 것들의 현현에 대해서 터무니 없이 적어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영화적 정서 재현에서의 우수라는 네이밍 된 것이 가리키는 것은 실제로 만만치 않은 것이다. 우수를 기본적 기초적 정서로 해서 제작되고 제공된 우리 영화는 다른 쟝르, 가령 멜로, 드라마, 코메디 따위에도 수없이 많이 등장한다. 우리 사회가, 우리 나라가 우익 국가로 우익 사회로 점철하고 있는 한 그 수요의 요청인 우수를 빌미로 한 영화 제작 코드는 면면할 것이다. 종말이 없는 곳, 종말의 사회적 체현이 사회적으로 심각하게 가상되지 않는 곳에서의 집단 허위의식의 물화, 영화화는 그것을 기본적으로 기초로 항시 작동된다. 

<명량>에서의 우수는 독특한 우수 영화의 새 라인업을 리얼리즘으로 재현시켰다. 죽지 않은 비극적 해군 장성인 것이고 그는 우리의 민족 성웅이다. 영화의 도입에서는 불길한 비극과 비극적 우수에 어려 현실을 죽음으로 초극할 민족 성웅도 예상했었지만 알다시피 영화적 재현도 역사적 사실도 그것과는 다르다. 그 영화에서 재현되지 않고 없는 것은 또 어떤 영화나 서사구조에서 체현될 게다. 꼭 일본 같은 나라에서 왜국(일본)과 전쟁을 하는 것을 영화적 재현물로라마 보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경험이었다. 멜로니 클라인의 대상관계를 잠시 빌자면 자아는 대상을 갖고 있을 때 두 가지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자아가 대상을 파악하고 있는 것일 때 대상은 누구를 파악하고 있을까 하는 점이고 자아가 대상을 파악하고 있을 때 그 자아를 파악하는 것을 파악하는 그것을 다른 대상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까? 후자는 얼핏 메타응시와도 유사해 보이는 느낌이지만 메타응시는 멜라니 클라인의 것은 아니고 후자와 메타응시는 별개의 것이다. 자아가 대상을 파악하고 있는데 대상은 상식적으로라면 그 자아를 파악하고 있는 것이 맞을 것이지만 꼭 그렇다라는 법은 없어 대상은 다른 자를 파악하여 사랑하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자아가 대상을 파악할 때 자아가 대상을 파악하는 그것을 누군가 파악하고 있고 그것이 자아의 내부의 존재라면 그것은 자아를 보는 새로운 존재의 등장이고 그 관계일 때 자아는 자기가 파악하는 것만 알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파악되고 있는 것으로 그것은 다른 자아에 의해서 대상이 되는 것과는 다른 내부의 작용, 작동이다. 라캉이라면 메타응시라고 할 것이지만 멜라니 클라인의 그 작용과 라캉의 메타응시는 분명 다른 작용인 것이다. 메타응시라고 했을 때 응시물이 중요해지지만 내부의 자아를 파악하는 다른 존재는 키노아이와 유사한 것 같다. 왜냐면 그 과정이 다시 파악되는 것이 반면 응시적인 것이므로. 

정유재란이 구성되면서 민족 서사는 승리의 서사로 반전된다. 민족을 우월하고 유구한 존재로써 개인 인정의 주체로 보는 어떤 가치관을 득세하는 세태를 다시 합리적으로 인정하고 봉합하는 역사적 지점의 재현인 것이다. 그 전쟁의 결과는 민족의 도태와 몇 백 년 후에 공식적 인정되는 식민화 트랙의 전조라는 점은 부인되는 것 같다. 자기 규모 이상의 전쟁을 하고 전쟁의 성과로써의 부 따위를 획득하지 못했을 때 도태되는 민족의 명운은 역사에서 비교적 흔했다. 여러 식민전쟁, 민족해방전쟁의 실패한 역사들이 이를 반증한다. <미션>같은 영화도 있다. 우리는 항시 우리의 승리와 영광을 가상하는 문화에 익숙하고 공식적 패전도 없는 문명에서 공식적 승전도 많이 드물다. 우리의 존재가 어떤 상태인가 하는 점은 실재로 대상관계의 어느 측면에 치중하는가에 따라 많이 다를 수 있고 우리들은 우리들에게 유리한 측면, 그 왜곡된 거울 보기에 어깨에 얹은 어머니(대타자)의 손의 촉감만을 느낀 채 상상계로 돌아가 진입한지 오래고 프로이트적 퇴행이라면 퇴행이라고 할 그 도정이 민족사의 명운이었다. <명량> 같은 영화가 대박이 나고 박스오피스를 갱신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그 영화를 봤으면서 구성되어진 현실을 되새김해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구성되어진 과거와 구성되어진 현재는 그리 거리가 멀지 않을 것이다. 종말이 없는 곳, 종말의 사회적 체현이 사회적으로 심각하게 가상되지 않는 곳에서 종말을 대체하는 것이 최후이다 라고 했지만 사실은 최후도 없는 곳, 최후의 사회적 채현도 사회적으로 심각하게 가상되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이 곳은. 영화적 환상과 무궁한 실재가 모두 보유되고 상상적 영토화의 신민들로 재림들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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