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 - 설정과 주체를 넘어 영화소개와평론

인간은 삶을 위해 매우 많을 것들을 만들고 그것들은 세대손손 승계된 것이며 그것들을 묶어서 문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문화는 인간의 사는 방식 그 자체를 말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문화를 말할 때 문화는 긍정적이라는 함의를 갖는 반면 그 외연을 넘는 삶의 다른 내포를 구할 수 있다. 수아(김하늘)처럼 우리는 사실은 짐스러울 뿐이기만 할 수 있을 것이고 그 현실적 짐으로써의 부당한 가치에 더해 더욱 부정적인 상상적인 가치로써의 '차양'일 수 있어 영화 제목의 두 번째 내포를 정해 볼 수 있는 경우를 상정하기로 했다. 장애인이 설정일 때 사실은 그녀가 맹인인 것을 포함하여 짐스러운 존재인 것이 사실적인 삶에서의 존재의 1차적 부당성이고 그녀는 무엇인가를 가리고 있다는 점에서 주체에게 부당한 것이었던 1차적 부당성과는 구별되는 2차적 부당성으로써의 것들을 구성하는 것이며 그 점은 우리 사회의 마이너리티가 현전하는 사회구성적 이유이다. 왜 그다지 비생산적인 그들을 그렇게도 구조는 비용, 희생을 해 가면서 마이너리티-제로로 존속, 발전시키는 것인가, 나들(우리)는 그다지도 도덕적인가, 그들은 그다지도 박애적인가? 사회적 구성물들이 사회구성체에서 수행하는 기능을 기준으로 그 존엄함을 외면해도 존재하는 것들의 총체는 문화일 것이고 문화가 긍정적이라는 외연을 갖는 것에도 불구하고 사실상의 내포를 의심하는 근저이자 근거이다. 왜 나들은 그녀를 관람해야 하는 것일까? 그녀가 수행하는 역기능, 부작용의 극장을 무슨 이유로 표 끊고 들어가 그 극장을 이렇게도 오랫동안 관람하고 있는 것일까? 메츠는 그의 저서에서 연극과 영화를 구별하는 구절들을 남기고 있다. 그 극장이 연극의 극장이라는 점은 그 극장이 영화의 극장이라는 점과 엄연히 구별되고 있는 점이고 그것은 동일시의 문제로 설명할 수 있다. 인간은 1차 동일시를 원초적 동일시로 해서 그 극장에 출현하기 시작했는데 2차적 동일시가 가능하기 시작할 즈음 부터 그 장소는 연극의 극장을 나와 영화의 극장으로 들어간 것이다. 지금 나들이 출현하는 극장의 관객/배우로 변신하게 된 것은 그 극장이 영화의 극장이 아닌 연극의 극장이 된 것이고 순수한 관람객의 지위로 2차적 동일시하던 지위는 관객/배우로서의 지위로 변한 것일 게다. 그 극장에 나들은 있다. 극장은 존재한다, 극장은 매트릭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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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아의 지위는 어느 날 불시의 사고를 당하고서 변한 것이다. 탄탄한 장래를 보장받는 경찰대학생의 지위에서 맹인룸펜의 지위로 변신한 것이다. 여성으로서는 드문 직업경로라서 재능, 역량 그리고 응집력만 있다라면 우리 사회 엘리트 지위로 경쟁을 거치며 편입될 수 있는 것이었다.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사회적 생산성, 노동성이 박탈당한 간단한 룸펜의 지위, 그것도 장애인(맹인)의 지위로 변신한 것이다. 그 의지적이고 도전적인 인물은 불굴의 투혼을 기대되기도 했겠지만 어떤 모종의 기회주의, 그 뛰어난 감으로써 재도약의 기회에 몸과 정신을 다 바치는 인물로의 전형적인 우리 영화 상투적 이야기 구조에서의 탄생을 하는 것이다. 새 주체가 헌 이데올로기 아래서 새로이 태어난 것이다. 인물 해석력이나 연기 해석력이 뛰어난 김하늘은 거의 뻔한 캐릭을 상당히 새롭게 구축해 내었다. 얼마전 본 <루시>에서의 불손한 창녀 같은 스칼렛 요한슨, 인색한 유태인 자린고비 같은 최민식 타입의 캐릭과 궤를 거의 먼저 구축했다라고 관련지어 보겠다.. 캐릭을 구축할 때 객관적 구축, 주관적 구축이 있고 내포적 구축과 외연적 구축이 있는데 대체로 고전적 영화들의 중심 캐릭은 옛 이데올로기의 자장아래서 객관적 구축을 주로 하고 내포적 구축을 한다. 3자들에게서 그렇듯한 존재로서 인식되고 그 중심적 이데올로기의 아이디어를 내부에 품고 있는 것으로 일본 영화의 인물들, 일본인적 개인상에 가까운 것으로 우리 고전적 영화들에의 그들의 암묵적, 비공식적 영화를 짐작케하는 것이지만 서구의 대중영화적 캐릭 구축과는 다른 것이다. 수아의 캐릭은 주관적 구축에 외연적 구축을 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 영화가 제도적인 통제를 벗어난 이후의 캐릭 구축에서 독보적, 예외적 구축은 물론 아니고 꽤 흔한 캐릭 공식일 것이지만 영화들이 서구 영화, 그 중에서도 미국 대중영화의 이데올로기 통제에 조우한다라는 것이고 그 지점들의 징후를 목격했다라는 것이다. 일본식 렌즈로 굴절된 한국 영화의 업보와 그 렌즈로 투사된 유럽 예술 영화 따라잡기의 묘한 열등성이 더디어 돈맛을 이해했다라고 한다라면 다른 손바꿈에 불과한 것일까? 영화는 당대와 조응한다, 영화는 당대의 함수관계에 따라 움직이면 그 예술적 사명도 다했다라 할 수 있다. 모래알 한 알에 우주를 새긴 것은 중국인을 모사한 어떤 일본인 도공일 것이다. 

<루시>를 언급하면 생뚱 맞은 것일까?? 영화의 엔딩에서 불손한 창녀는 'I am everywhere(?)'로 변신해 있었다. 개체에서 전체로 변신하면서 이름에 칼든 배우가 분했던 캐릭은 전체가 되었다. <블라인드>에서 이미 맹인이 되어 버렸던 개체는 전제로 변신하지 않는다. 전체적인 지위에서 개체적인 지위로 변신하면서 부분이 된 것이 수아의 승리이다. 객관적으로 조응되던 회상 후의 맹인은 이해의 폭을 파괴하면서 주관화되고 그렇게 내려앉아 객관적 신을 탈피하여 부분적인 인간으로서의 생활인 맹인으로 되어 버렸다. 공히 엄청난 모험을 한 것이고 둘 다 안티적 파트너가 있어 최민식, 유승호다. 그 외 주체를 파괴하는 부차적 주변인물들의 설정도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서사구조도 거의 같은 것으로서 같은 구조를 참조한 것으러로서 동일시될 수 있다. 영화가 거의 같아 지는 포스트모던적 경향이 목격되는 지점들이다. 같은 구조로 형해화된다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게 바로 이데올로기적 관계이다. 세계화 이후의 동일시된 세계에서 영화가 관객들에게 제시하는 영화당의 규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영화와 나들의 동일시인 캐릭이 제공하는 주관적 구축, 외연적 구축인 것이다. 영화보기는 메츠의 시간부터 지옥문을 연 셈이고 메츠는 자살로 자기영화에 차양을 쳤다. 아무도 못 보는 자기영화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 위에 차양을 내렸기에 신사적인 나들 관객은 그 차양을 거둘 엄두를 내지 못하였는데 누군가 그 차양을 치워버렸고 그/그녀가 누군지 알 수는 없다. 세계화 이후의 영화에서의 동시대적 조류를 목격하면서 궐위되어 버린 객관적 영화, 내포적 영화도 다시금 생각해 보기도 한다. 일본 영화 같은 그 영화들의 쓸쓸함은 구세대에게는 어떤 묘한 향수심, 노스탤지어를 주었을 것이지만 이미 그들은 상업적으로 패배했고 대중들의 주목을 잡는 데에는 다시 회복하기 어려울 것 같다, 아니면 매우 긴 시간이 걸릴 것일 뿐인지도. 포스트모더니티의 시대의 영화가 갖는 상업적 흡인력을 모사하는 것은 어렵다. 오래고 누적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경로를 바꾸거나 변신해야 하는데 그 조류가 계속될지 다른 대립, 투쟁의 속에서 전기의 승자들이 파트너를 바꿔야 하는 것인지 하는 것은 나로서는 불분명하다. 영화 한 편에서 세계를 얻을 수 있다라는 것은 오류이자 허구이다. 단지 그 세계의 모사된 일부를 얻을 수는 있을 게다. 그도 아니라면 다른 형식의 주관적 구축을 호용해햐 하는 것이고 그것은 또 다른 영화가 되는 것이다. 대체로 생산되는 바가 그러하다. 생산의 연관관계를 연구할 필요는 없겠지만 생산이 연관되는 관계를 이해하고 있다라면 좋을 것이다. 주관적 구축을 얻었다라면 외연적 구축을 놓치지 말라고는 할 수 있는 것이다. 주관적 구축이 포함하는 관계에 더해서 외연적 구축이라는 어떤 새 평론가를 더한 것이다. 주관적 영화에 이어서 외연적 영화가 생산의 연관관계의 다음 무대라고는 예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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