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열차 - 영화적 허구와 미지의 세상 영화소개와평론

영화를 상상적인 기표로 이해하면 그 분모(혹은 분자라서 정반대)는 그 영화의 기의일 것이고 그 기의도 상상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이 일치성에 어울릴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의 영화는 상상적 기의 분에 상상적 기표(혹은 상상적 기표 분에 상상적 기의)의 관계항을 맺는 어떠한 미디어일 것이고 그 미디어는 형식미학을 포함하는 내용의 총화일 것이다. 영화도 기표와 기의(혹은 기의와 기표)가 맺는 비율이라고 하고 그것의 성격을 상상(계)적인 어떤 것으로 하는 것이다. 영화에 관해서 분명해지는 것이다. 영화의 정체는 어떤 정량화로 환원되는 것이고 정성적으로는 라캉의 도구를 원용한 것으로써의 상상계로 2차화하는 것이다. 영화를 기표현상과 기의현상의 비율로 볼 때 기표적인 그 영화의 특징, 기의적인 그 영화의 특징은 소거되는 것이고 둘 사이의 비율만이 정량화한 그 어떤 것으로 만일 영상이나 사운드 같은 것을 정량화되어지는 관계로 환원시키는 방법을 안다라면 그러게 되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정성화된 성격은 상상적인 것으로 일치성을 확보하면서 성질을 부여케 된다. 정량 플러스 정성적인 규정은 영화인 것이고 개별 영화에서의 그것은 어떤 등급이나 범위로 화원되는 것이 고작이며 질적으로는 일정한 규정에 종속되며 그 특성은 자유로울 수 있다. 나들은 드디어 정량적이고 정성적인 범주를 같이 얻은 것이며 그 계산과정, 평가과정을 거쳐 몇몇 의미화될 수 있는 것들의 한계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은 적어도 배제시키는 것들의 상당한 범위를 같이 확보하는 것이고 그 덕택에 많이 좁힐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이 아닌 경우들의 체적을 확보하는 것이고 그것인 경우들의 용적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제는 그 둘사이의 비율을 또 다시 추정하게 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어떤 임의의 값을 확보할 수 있는 데 그것은 영화와 영화-아님 사이의 관계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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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가 영화적 허구라는 말이 있다. 그러면 허구가 아닌 영화도 있다라는 말일까? 공식적인 분류에서 다큐멘터리는 허구가 아닌 영화라고 분류되는 것이고 대부분의 극영화들은 허구라고 하거나 사실과의 어떤 비율적인 소재관계의 정도를 확보하면서 영화적 허구로 분류된다. 이 경우일 때 <설국열차>는 완벽한 영화적 허구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꼭 그렇지만은 않다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알게 되는 것은 그 영화가 보여주는 진실된 세상으로서의 것과 영화 기법상의 문제들의 것들 때문이다. 영화적 허구와 그렇지 않은 것들은 점근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진실이라는 것이 수없이 다른 방향으로 뒤집히는 개별적인 것일 수 있고 은유, 상징, 혹은 환유나 제유 어느 쪽이건 그 영화가 종사하는 기법상의 정향도 무척 개별적이고 부분적인 것이라서 사실상 허구를 중심으로 나누는 이분법은 개별적인 관객의 개별적인 인식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그 영화에서 일정한 반-허구를 취할 수 있었던 관객들이 많고 그것이 가하는 가동의 힘, 상상력의 힘이란 영화가 갖는 달란트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무엇을 보거나 회의하는 직업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또 다른 회의적인 이분법이다. 그것이 비록 허구적인 것이 아닌 반-허구의 것으로서 진실된 것으로 확보되어도 이분법의 다른 평면에 있을 수 있다라는 것이고 순순한 의미의 진실된 것을 버려보는 것도 좋다라는 것이다. 행위자가 확보한 것이 행위자의 이데올로기에서의 참된 것, 진실된 것 그래서 반-허구적인 것이라고 할 때 어떤 경우에만 그 가치가 무효가 될 수 있는 것인가 하면 행위자의 자유의지를 가상할 때 행위자의 자유의지가 부인되는 경우라면 그것은 무효가 되는 경우이며 그 경우 그 영화는 영화적 허구의 또 다른 전범일 뿐인 것이고 나들은 잠정적으로 허구가 아닌 영화는 전혀 없다라고 가상해 볼 수 있다. 

자본주의 영화라는 말이 있고 주관적 영화라는 말이 있으며, 비율로만, 영화 기표와 영화 기의의 비율로만, 기표나 기의의 실상을 무시하고 그것들 간의 비율로만 영화를 환원해 보는 동기인 것이다. 영화를 볼 때 나들을 구속하는 체계의 문제를 중시할 때 그것은 주관적 영화고 영화를 구속하는 체계의 문제를 중시할 때는 자본주의 영화인 것이며 두 구속체계 간의 공통적인 체계를 가상한다라면 나들은 개별적인 영화의 비율을, 그 영화의 기표, 기의 간의 비율을 가상하기도 계산하기도 하는 것이다. 공통체계 위의 영화를 가상할 때 공통체계에서의 좌표를 확보하기 보다는 그 영화의 기표, 기의를 가상해 그 비율을 구하여 그 좌표의 대리물로 사용하는 것인 것이다. 기호(기표, 기의)들의 망을 이해하면 전체에서의 자리값을 찾는 것을 그 값을 통해 전체적인 맵을 구하는 것으로 치환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우리는 세계를 알기 위해 그 모든 곳들을 다 탐험할 필요는 없는 것이며 내가 있는 포지션을 전환하여 세계를 재구성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자본주의 영화의 실상을 이해하는 것이 목적이 아닐 지라도 주관적 영화의 탐험은 곧 자본주의 영화의 실상으로 전환되는 것이고 세계의 진정한 상산을 이해하는 목표에도 부작위하게 도달하여 난 당신에게 미쳤다라고 하겠다. 자본주의 영화는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추상과 구상으로 얽힘 거대한 망이자 네트워크이고 주관적 영화란 그 속의 어딘가의 좌표값에 대한 행위자 머리속의 내부적인 저항이자 전선이다. 나들은 그 거대한 구조를 염두에 두어야 하지만 실제로 그 거대한 코끼리의 실상을 잘 알 수는 없이 그 체의 어딘가 그 국소적인 일부를 착각하고 있는 것이고 그 자리가 비틀릴 때 탄생하는 것이 주관적 영화이다. 주관적 영화의 극장은 궁극적으로 국부적이고 그 관객은 나 홀로 일 수 일 지 모른다. 서로 같이 보더라도 서로 상이한 우주로 홀로 부유하면서 궁긍적으로 나뉜 체인 나들을 체험하는 것이 사람의 운명이다.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가상의 문화의 가상 이데올로기의 강변으로 세뇌되고 블랭킷이 되어 버린 투명한 자아를 얻는 것일 게다. 

<설국열차>에서는 충분히 가시적이지 않은 지배층과 완벽하게 가시적인 피지배층이 대립하고 있는 것이고 그 대립의 매개물은 고기이다. 그 체가 주는 완벽한 슬픔은 피지배층의 완벽한 통일된 정서의 얼음이고 그 얼음을 뚫고 기차는 달리고 있었다. 피지배층은 가장 낮은 층에서 부터 가장 높은 층으로 전진하는 진보의 영상수사학을 재현하는데 그 과정에서 그들은 내화면의 정치와 사회를 보게 되는 것이고 이윽고 열차는 파괴되고 세상이 멎은 후 소수의 어린이들만 제2의 세상에 남겨지게 되는 것이다. 대체로 영화는 그 어떤 경우에나 자기가 구속된 체제의 이데올로기적 선전물, 선점물이라는 팔자를 벗어날 수 없을 만큼 이데올로기적 정련되어 세상에 출몰하도록 하는 공정과 그 공정들의 네트워크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 영화가 실제적으로 가장 반-이데올로기적 정련의 결과라고 가상되더라도 잘 보면 그렇지 않다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그 정도의 것인 것이다. 이러한 때에 나들의 고민은 좀 다른 상황들에 관한, 좀 다른 세상에 관한 자유의지를 모색하고 되새기기도 하는 것이다. 영화적 실재계를 가상해 보는 것이고 영화적 실재의 끝은 주관적 영화인 것이며 자유로운 자유의지의 관객들이 새로이 탄생하는 지점을 같이 탐색하기도 모색하기도 하는 것이다. 영화적 실재가 재현되는 것은 마치 정도령의 복환이며 누은 미륵불이 일어나 세상을 굽이 살피는 것이기도 하다. 실재로만 가득한 현실주의자들의 세상에서 그것은 예수의 재림쇼를 바라는 슬픔 민초들의 슬픔 소망인 것이고 이 또한 그 또한 수도없이 왜곡되고 조작되어 이제는 그제는 기적조차 상업화, 실재화 하는 그로한 철궤이며 그 위로 나들의 설국열차가 얼음산을 뚫고 고스크리프트의 검은 기차가 검은 마의 산에 드리받는 것 처럼 행진하는 것이다. 이미 검은 깃발은 드리워졌고 기차의 궤적에서 브레이크를 밟는 다는 것은 없어진 것이다. 실재계가 출현하는 영화적 기적을 조용히 기대하면서 어떤 아이의 미소는 지어진 것이고 어떤 폭죽소리, 어떤 오토바이 엔진소리를 나들은 항상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실재의 세월이라면 바다 깊이 내려 간 소금인형도 어떤 덧댄 곰인형도 그들만이 아는 것이렴만 이제 그 창성을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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