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숲 - 거울에서 창문으로 갇힌 영화소개와평론

거울은 자아의 보기의 1국면이다. 라캉적 상상계와 동일시 되며 자아를 알아가는 최초단계 가령, 구강기-항문기와 유사할 것이다.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개체의 자유 국면인 것이다. 개체가 만들어지는 국면과 계기적 조우하지만 시기적, 통사적으로는 무관할 수 있어서 인간의 퇴행적 국면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내 경험에 퇴행하면서 자기방어를 하던 사람들은 아주 흔하디 흔하여 독자의 사생활에서 혹은 자기자체에서의 어떤 국면에서도 반성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창문은 세계의 보기로 2국면이고 라캉적 상징계와 동일시 되고 자아가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레닌적이라면 객관적 현실을 이해하고 발견하는 것이고 훗설과 마하적이라면 객관적 현실을 (극단적이라면 주관적으로) 발명하는 것이지만 그 견해들에는 순전히 순수히 동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퓨어한 주관현실을 객관 현실에 선행시켜서 일반적 현실로 동일시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견해이어서 고학적 세계관과는 배치되는 것으로 한다. 창문은 사실은 왜곡된 그대로의 세계관이고 우리는 진정한 세계에만 관심있는 것이어서 창문을 열고 세계를 본 것을 변형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이 물자체로라는 의미로 주어진다라는 것은 그래서 획득하거나 한다라는 것은 칸트적, 헤겔적 왜곡일 뿐이다. 

<거미숲>의 줄거리는 그렇게 명료한 것은 아니다. 주관적 구성에 따라 다른 영화, 다른 서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과거의 상처를 갖는 주인공은 방송국 피디인데 같은 방송국 직원과 재혼을 염두에 두고 있다가 어떤 제보를 받고 거미숲에 입장하게 되고 그 스크린적인 공간에서 그녀의 간통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에 분노하여 살인을 하고 범인을 쫓는데 그 범인은 사실은 자기자신이었다라는 것을 차후에 알아가면서 자기자신이 미친 것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고 거미숲의 가옥, 혹은 정신병동의 가옥의 창문을 통해 세계를 보고 봤던 것이 회귀하는데 그것은 미치광이의 시각이어서 관객은 그것을 계기적 사건으로 서사구조의 전체를 의심하는 인식에 도달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주인공을 신뢰했던 관객은 그 반대로, 처음부터 주인공을 의심했던 관객도 그 반대로 전환하는 것이고 세계상의 객관주의가 심대하게 훼손되는 것이다. 극장을 나서면 관객의 다수는 서사구조가 의도했던 대로의 것의 반대를 회의하고, 관객의 소수는 서사구조의 의도하지 않았던 대로의 반대를 회의하여 의도했던 서사구조로 통합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영화의 서사구조는 세 주체(관객성이론)를 탄생시킨다라고 이론적이지 않고 이론의 전통을 빗나가는 공리주의적, 프래그마티즘적, 경험주의적 결론에 도착하는 것이다. 영화 자체가 일종의 창문이라는 점이 현화되는 지점들이다. 고전적 주체는 사실상 항시 단일하였고 상대주의적 세계관이 고전적 주체관과 병존, 동거하는 데에는 사실상 문제가 전혀없는 것인데 이데올로기적 상대주의의 공격 목표가 그것인 것이고 자본주의 영화의 제작 결과와 이데올로기적 목포는 거의 모든 경우 모순적이다. 미학의 지점들이 골치아파지는 것은 당여한 것이며 자본주의 미학이 그렇게 결론지어지는 것은 그것이 꼭 사회주의 미학, 코뮤니스트 미학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진리가 자본주의 미학과 모순조우하는 곳들이 거의 항상 그런 것이고 영화에 정신분석학을 도입하여도 분과 진리는 또 다시 다른 것과 경합(모순)한다. 재현물인 영화가 현실인 현실세계와 모순이거나 재현물인 이론이 현실인 현실세계와 모순이거나 하는 것이다. 

진리의 척도로서 영화에게 거울이거나 창문인데 그것은 스크린의 별명이고 주체의 시각의 별명이다. 연극이거나 마당극이라면 무대와 같은 것이 있어서 주체의 설정이 객관적이기 더 좋은 것이고 영화관의 주체는 사실상의 일방적이고 모노리식한 주체를 구조화한 채로 주체를 재경험, 재탄생하는 것읻가. 창문으로서의 영화는 거울상으로서의 영화와 판이한 것인데 주의할 점은 거울도 왜곡되지만 세계로 열린 창도 왜곡된다라는 점이다. 똑같이 부분인식인 것이고 우리들의 확률통계학적 세계관이 인과율의 세계관을 전도시키는 것도 경험할 것이다. 창문으로서의 영화 안에 창문이 또 제시되는 그것도 아주 분명하게 제시되는 미학적 장면이 그 영화에서는 두어번 있어서 진리의 문제를 새삼 재생상하게 하였다 하겠다. 

진리의 문제는 거의 대부분 부분인식, 전도인식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편집된 부분만을 갖고 전체를 사유하게 만들고, 거의 이데올로기적으로 여과되거나 반정립된 전체상을 갖고 일반화를 사유해야 하며, 그것에 더해 우리들은 직간접적으로 증거를 사용해야 하고 심지어 실증해야만 하는 주체의 사유과정, 매우 칸트, 헤겔적인 과정을 하게 되고 그것이 계급통제를 재생산하는 우리들의 일반적인 문화적, 교육적 조건이다. 

완전인식, 전체인식에 대해서 맑스라면 무엇을 말했는가 알 수는 없다.

변증법적 전도, 유물적 해석으로 분립된 두 주의의 자장 아래 갇힌 맑스의 상을 갇고 있는 것이 남한 지적 엘리트의 끝이기도 하다. 

그 이상의 것에 대해서 책임질 이유가 있을까 하니 그럴 필요도 없는 게 지적 편집증으로나 몰리지 않으면 다행인 것이 사회구성의 조건이기도 하다.

고로, 진리는 기각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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