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싱 영화소개와평론

어디선가 북한 사회의 영상을 봤는데 이로 형용할 수 없는 정감이 밀려왔다. 마치 과거 사회의 미덕을 아직 보존한 녹색 지대에 방부되어 보전된 느낌이었다. 향수를 자아내는 전체성의 감정이 시공간을 초월해 밀려왔다가 밀려나갔다. <크로싱>은 그렇지는 않았다. 영화 제작이 한국과 중국, 몽골에서 이뤄졌으므로 북한 사회의 기운을 가득 담은 것은 아니었다. 북한을 비롯한 개방되지 않은 사회주의 국가의 사회를 다녀봤던 사람은 그 사회국가의 분위기가 남다르다고 증언한다고 한다. 영화 속의 북한 사회는 그들의 선전하는 부분과는 달리 가난하고 개발되지 않은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황색의 탄자니아를 체험한 기분이었고 영계, 선계를 닮은 주체의 나라의 재현이었다. 북한은 사람이 많이 죽어서 그 영혼과 함께 거한다고 한다.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의 자유가 없는 유물의 국가에서의 죽은 사람은 어디에 거할까? 천국이나 지옥도 없이 산 사람의 곁에 함께 거한다고 할 수 있다. 사회의 규칙이 인정하지 않으면 그게 실체라도 없는 것으로 치부되어 그 존재의 진실은 그 사회의 잔여계로 빠져든다. 혁명과 전쟁 이후 무수한 사회주의 도정의 고비마다 많은 사람이 사회적 질곡을 그렇게 헤엄쳐 넘어갔을 것이다. 그 녘의 인간의 진실로 수용되지 않는 당의 진실적 무오류 검토를 인간의 애정으로는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그 녘의 인간은 애정도 반납하여 자연적 인간의 폐지를 사회적 인간의 수용으로 대체하였다. 사회나 인간이나 인간의 정념이 모두 새로이 만들어져 이제 상당한 시간이 흐른 북한 사회의 현주소는 어디일까 흔들리고 있었다. 인간의 낱의 두께를 혜량하면 그 깊이가 사라지고 본능적 인간의 긍정이 새로운 자리를 잡는다. 인간 개조의 모형은 실험실적 사회를 우선 경제적으로 불량하고 삶의 모순을 더욱 더 심화시켜 인간의 모순을 해체하는 당성 국가를 창조했다. 존재론적 인간이 당위론적 인간을 대체하는 사회를 재생산하는 기계는 해체 후 재조립을 너무 많이 심하게 받지 않았을까 자신의 삶이나 사회적 책임을 전제에게 부여된 채로 산다. 우리 사회가 자유 시장 경제의 발달로 민간이나 개인에게 영리 추구의 자유가 넘어가고 국가는 사회복지를 책임지는 최소의 정부로 변형되는 중이다. 삶과 생활에서의 다양한 권한이 날이 갈수록 과거 사회와 달라져 민간이나 개인의 향유 폭이 넓어지고 신장되어 사회적 책임의 수여를 권한다. 영화에서의 북한 사회는 남한의 시각으로 만들어져 개인의 인적 권한만은 존재하는 사회로 그려졌으나 영화적 제한폭을 넘으면 실제의 그 사회는 개인의 인적 권한도 당이 회수하여 있는 중이다.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는 다른 신분의 사람이 거하는 당시를 가상해 보면 계급 없는 연대의 사회라는 구호 역시 가상에 불과하다. 자율적인 인간의 도시 평양의 사람을 보여주는 선전 영상은 생각보다 흔해 우리나라 텔레비전으로도 흔히 볼 수 있다. 만약 우리 국가사회에서 내가 사는 서울을 벗어나 향곡으로 이동하면 이 영화에 대해서 어떤 모습을 구현할 수 있을까? 당이 통제하지 않지만 자본이 통제하는 국가의 변두리에는 전도된 형태의 김용수(차인표 분)나 그의 가족, 이웃이 존재하지 않을까? 돈 문제와 노동 현실로 난관에 봉착하여 미국으로 도망가듯 이민을 가는 김용수 말이다.  


덧글

  • PFN 2019/10/01 08:58 #

    글 참 못쓰시네요
  • 오늘사람 2019/10/01 14:30 #

    앞으로는 글 잘 쓰도록 노력을 하겠습니다.
  • 함부르거 2019/10/01 09:45 #

    문단이라도 좀 나누면 읽기 편할 거 같습니다. 이렇게 쓰시면 가독성이 너무 떨어져요.
  • 오늘사람 2019/10/01 14:31 #

    앞으로는 문단을 나눠 가독성을 높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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